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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서적

제목음식토종비결 6- 46.해삼 2018-04-21 23:07:49
작성자 Level 10

46.해삼 

 여름잠 자는 바다의 삼

 산에서 나는 자연산 삼을 산삼이라 하고, 인공으로 재배해낸 것을 인삼이라 한다면 해삼은 '바다의 삼'이 되는 셈이다. 그러면 바다에서 나는 어패류의 일종인 해삼도 산삼이나 인삼 만큼 그 성분이나 약효가 탁월한 것일까.
 여기서 일단 옛 문헌을 참고해보자. {전어지} <해삼조>에 의하면 '해삼은 성질이 따뜻하고 몸을 보비하는 바 그 효력이 인삼에 맞먹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또한 이 책에서는 해삼에 대하여 다른 설명도 자세하게 덧붙이고 있는데 바다에서 나는 여러가지 동물 중에서 몸을 가장 보하는 것이 해삼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한편 {오주연문장전산고}라는 책에는 '해삼변증설'이라는 것이 나오는데 '해삼은 더덕이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어 변하게 된 것' 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어떤 문헌에서는 해삼을 남자의 성기에 비유한 것도 있다. 과연 해삼의 생김새를 보면 시커먼 것이, 남자의 그것이 연상되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에서 예로부터 해삼이 남자들의 술안주로 각광을 받아온 것도 어쩌면 이런 엉큼한(?) 속셈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해삼류에 속하는 바다 동물들은 대부분 몸이 좌우대칭이고 생김새는 표면이 울퉁불퉁한 오이를 닮았다. 문어나 오징어처럼 관족이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에 따라서는 아예 퇴화되여 없는 것도 있다. 그래서 언뜻 보면 큰 것은 도깨비 방망이 같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오이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자산어보}의 해삼조에는 해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큰 것은 2자 정도이고, 몸의 크기가 누런 오이와 같고, 전신에 작은 젖꼭지가 널려 있다. 또한, 누런 오이와 같이 양머리는 모가 조금 죽었고, 한쪽 머리에 입이 있고 다른 한쪽 머리에 항문이 있다. 배 속에 어떤 물체가 있는데 그 모양이 밤송이 같다. 창자는 닭의 것과 같고 가죽은 매우 연하여 잡아 들어올리면 끊어진다. 배 밑에 많은 발이 있어 걸을 수 있으나
헤엄칠 수 없고 그 행동이 매우 둔하다. 빛이 새까맣고 살은 푸르다.'   위에서 '젖꼭지'라고 표현한 부분이 바로 퇴화된 관족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나는 해삼은 몸길이가 대략 한 자 정도이다. 사는 곳은 바닷가의 암석, 진흙, 모래, 해조 등 여러 곳이다. 주로 현탁물이나 퇴적물을 먹고 산다. 입 주위에 있는 20개의 촉수로 바다 밑바닥에 있는 개펄을 그대로 빨아들여서 그 중 양분만을 흡수하고 나머지는 체외로 배출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다에 살지만 바다 밑바닥의 토양을 먹고 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해안에서 난 해삼은 우리 토양의 성질을 닮았다고 할 수 있겠다.   해삼의 종류는 세계적으로 현서종 약 900종이 알려져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4과 14종이 알려져 있는데 우리나라 전 해역에서 난다.   {물보}라는 책에는 수족편에 해삼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해삼을 해남자라고도 하고 우리말로는 '뮈'라 하였다' 한다. 또한 {재물보}에서는 해삼을 '토육'이라 하고, 속명을 해삼,우리말로는 '뮈'라고 한다' 고 하면서 '바다 속에서 살며 색은 검고 길이가 5치, 배가 있고 입과 귀는 없으며 발이 많다'고 하였다.
 또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해삼은 여름잠을 잔다. 해삼은 수온이 16℃ 이상이 되면 식욕이 감퇴되고 소화관이 위축되는데 이 때부터 여름잠을 준비하다가 25℃ 이상이 되면 완전히 잠에 빠지게 된다. 다른 포유류 동물들이 동면을 취하는 것에 비하면 해삼의 여름잠은 꽤나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예로부터 해삼은 전복, 홍합과 함께 삼화라고 하였다. 이것은 우리나라 해안에 해삼이 널려있으며 우리 어민들이 그것을 잡아다 팔아서 소득을 올렸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처럼 해삼이 우리나라의 중요한 수산자원이 되었던 것은 해삼의 수요가 많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해삼은 고유의 맛 말고도 어떤 훌륭한 약효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이제 해삼의 성분을 살펴보기로 하자. 

 성분 

 해삼의 성분은 대부분 수분(약90%)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단백질, 지질, 당질, 회분, 칼슘, 인, 철분, 나트륨, 칼륨, 비타민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서 단백질과 당질의 양은 적은 편이며 회분의 함량이 많다. 따라서 해삼은 칼슘, 철, 인 등을 제외하곤 영양적 가치는 적고 비타민의 함량도 기대하기 어려울 만큼 적어서, 흙에서 나는 산삼이나 인삼과 같은 약효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특히 우리가 먹을 수 있는 몸통 부분은 껍질(상피)과, 전후로 뻗어있는 복관과, 직각으로 발달한 섬유 모양의 조직으로 대부분 섬유로 이루어진 결합조직이다. 이처럼 해삼의 몸통은 다른 어패류 처럼 근육질로 이루어지지 않고 섬유질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소화, 흡수되기 어렵다. 다라서 해삼은 단백식품이라기보다는 기호식품으로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한방에서는 해삼을 '신장을 튼튼하게 해주고 기운과 정력을 돋구어 주는 정력강장제'로 보고 있다. 사상의학의 원리로 본다면 해삼은 체질적으로 신장의 기능이 약하고 정력이 부족한 소양인에게 적합하다고 할 수 있겠다.

  쓰임새

  우리나라에서 해삼은 술안주 등으로 주로 생식한다. 주둥이 부분을 잘라 몸통을 벌려 개복한 후 내장을 꺼내고 소금을 약간 뿌리면 미끈거리는 점액이 제거된다. 이것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초간장과 곁들여 먹으면 별미다. 뿐만 아니라 해삼의 내장으로 담근 젓은 고노와타라고 하여 일본에서는 진미로 손꼽힌다.
 해삼은 탕으로 만들어 먹기도 한다. {규합총서}에서는 열구자탕과 어채의 재료로 해삼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한 해삼은 중국요리의 재료로도 많이 쓰이는데, 중국요리에서는 내장을 제거하고 쪄서 말린 건해삼을 일주일 정도 쌀뜨물에 담갔다가 사용한다.
 해삼은 소화 흡수율이 극히 낮으므로 비만을 걱정하는 사람이나 고혈압 환자에게는 좋은 기호식품이라 하겠다. 특히 술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살 안찌는 술안주로도 적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참고로 해삼의 소화흡수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살짝 데치거나 초를 쳐서 먹으면 된다. 특히 제주산 홍해삼은 영양가를 보존하기 위해서 데쳐 먹으면 좋다.

  이것이 토종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온대산의 '참해삼'에 속하는 청삼, 홍삼, 흑삼 등 3종류가 생산된다. 이중에서도 홍해삼은 제주도 부근에서만 생산되고 청해삼, 흑해삼은 남해안과 서해안에서도 생산된다. 생산량도 많아서 일찌기 중국 등지에 건해삼을 수출했는데 중국에서는 우리나라산 건해삼을 '조선인삼'에 비유해 '바다인삼'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직까지 해삼은 날것 그대로는 수입되고 있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해삼을 주로 생식하기 때문에 갓 잡아온 싱싱한 해삼이 아니면 상품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관용으로 가공된 건해삼은 남방산이 대량으로 수입되어 중국요리의 재료로 사용되고 있다. 해삼을 건조, 가공할 때 국내산은 배설강을 통하여 내장을 제거하나 수입산은 복부를 절개하여 내장을 제거한다. 또는 아예 내장을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말린 것도 있다.
 그리고 수입제품이 아니더라도 해삼과 비슷한 어족인 군소를 해삼으로 속여서 내놓는 경우도 있으므로 유의해야 한다. 군소는 해삼에 비해 배가 불룩하고 머릿 부분에 두 개의 돌기가 있다. 또한 표피가 부드럽고 요리를 할 때 스펀지 같은 느낌을 준다.
 옛 문헌의 기록에 의하면 동해에서 나는 해삼은 살이 두껍고 좋으며, 서남해에서 난 것은 살이 얇아 품질이 떨어진다고 한다. 낙산사(낙산사) 일대에서 해녀들이 갓 잡아올린 강원도 양양 부근의 해삼과 제주도 등지의 해삼은 유명하다.

  *** 참고자료

 1.{민족문화대백과} 
 2.{한국식품사전}, 신광출판사
 3.{생선과 건강}, 수산신보사 
 4.{국내산과 수입수산물의 식별방법}, 수산청 어정과, 자료집 
@   47.굴

 갯바위에 피는 꽃

 굴은 일명 '석화'라고도 하는데 멀리서 보면 따낸 굴조개 껍질이 바위면에 하얗게 붙어있어서 마치 꽃무더기를 연상하게 한다. 그래서 '돌꽃'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벗굴과에 속하는 쌍패류를 모두 가리켜 굴이라 한다. 굴은 그 종류가 다양하여 모두 합해 대략 20여 종에 달한다. 굴과에 속하는 조개는 고착생활을 하는 장소에 따라 크기가 일정치 않지만 대략 5∼10Cm정도이다. 껍질의 안쪽은 백색이고 두 조가비가 맛물리는 곳에 이가 없다. 경사가 완만한 해안의 바위 등에 서식하며 초여름에 산란을 하고 대략 1년 정도면 성숙한 굴이 된다.
 굴은 조개류 중에서도 유난히 생명력이 강하다. 열대, 온대, 한대 지역을 불문하고 모든 근해에서 서식하고 있으며 예로부터 세계 각국의 식생활 문화에 흡수되어 왔다. 어패류를 날로 먹는 습관이 거의 없는 구미인들조차 굴만은 껍질에 붙은 그대로 레몬즙이나 케챱을 곁들여 먹는다.   굴은 기원전 로마 시대부터 양식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유명한 쥴리어스 시저가 영국 원정을 계획했던 것도, 템즈강 하구에서 잡히는 굴이 목적이었다는 설이 있다. 또 나폴레옹은 촌각을 다투는 전쟁 중에서도 제 철을 맞은 싱싱한 굴만큼은 식탁에서 빼놓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독일의 비스마르크도 생굴의 껍질에 남은 즙을 곧잘 핥아 마셨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영웅은 굴을 좋아한다'고 해도 좋을 듯하다. 그러나 굴을 좋아해서
영웅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굴에 함유되어 있는 풍부한 영양이 힘과 지혜를 길러주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굴이 언제부터 양식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근거를 밝힐 만한 자료가 없다. 1908년 경 섬진강 하구에서 일부 굴양식을 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 때의 양식 방법 등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그리고 1908년 이후에 일본인들에 의해서 영산강 하구와 송전만 등에서 양식업이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본격적인 굴양식은 1950년대에 이르러서야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1970년대에 와서는 수하식 굴양식업이 성행하여 경남 충무를 중심으로 남해안에서 빠른 속도로 발전하였다.
 이후에도 굴 생산량은 계속 증가했으며, 이렇게 생산된 굴은 대부분 생굴로 우리 겨레의 밥상을 상큼하게 장식해 주었고 나머지는 건굴이나 통조림 형태로 가공되어 수출되기도 하였다. 

 성분 

 굴은 3대 영양소는 물론 비타민, 미네랄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영양분을 함유하고 있어서 완전식품인 우유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 따라서 굴을 일컬어 '바다의 우유'라고 한다. 또 체내에서의 단백질의 이용척도를 '아미노산 산가(산가)'로 나타내는데 우유의 아미노산 산가를 100으로 할 때 굴의 산가는 77이 된다.
 그리고 굴에 들어 있는 지방질은 콜레스테롤치를 내리는 다량의 불포화 지방산을 함유하고 있다. 콜레스테롤치가 걱정이 되어 생굴을 놓고 입맛을 다시면서도 망설이는 경우가 많은데 염려할 필요가 없다. 굴에는 다량의 콜레스테롤이 들어있지만 동시에 '타우린'이라는 황이온을 포함하고 있는 아미노산의 일종이 들어 있어 이것이 콜레스테롤의 해를 제거해 준다. 이것은 임상실험을 통하여 밝혀졌다.
 당질에 있어서도 굴은 우유보다 뛰어나며 특히 글리코겐(포도당의 저장형태)을 다량 함유하고 있기에 굴이 건강식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임상실험 결과, 굴은 또한 중성지방의 수치를 내리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실험 결과로 증명되듯이 굴은 중성지방의 수치를 내려 각종 성인병을 예방할 뿐만 아니라 알콜과 피로에 시달린 간장을 보호하는 작용을 한다. 간장의 활동에 필요한 영양소는 글리코겐인데 굴에 이 성분이 다량 들어 있으므로 간장이 약한 사람이나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제 철에 나는 싱싱한 굴로 간장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주의할 점은 글리코겐을 포함한 당질은 간장에서의 허용량을 초과해서 섭취하면 글리코겐이 되지 않고 중성지방이 되어버린다. 당질을 지나치게 섭취하면 살이 찌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현대인의 식탁에서 가장 결핍되기 쉬운 영양소는 '미네랄'이다. 미네랄이란 신체기능을 조절하는 광물질의 총체로 우리 몸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 그 종류를 열거하면 나트륨, 칼륨, 칼슘, 인, 마그네슘의 5가지 다량 원소와 철분, 아연, 구리, 크롬, 요오드, 코발트, 셀렌, 망간 등 8종류의 미량원소가 그것이다. 굴에는 이러한 미네랄이 거의 모두 들어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네 식단에서는 부족하기 쉬운 영양소를 풍부하게 함유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굴에 많이 함유되어 있는 것은 아연, 구리, 마그네슘 등이다. 이밖에 구리는 조혈작용을 하는 것으로 빈혈을 예방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이다. 여성들에게 자주 보이는 빈혈을 보통 철분 부족으로만 생각하는데 구리가 부족해서 생기는 빈혈이 더 많다. 이밖에 마그네슘의 작용도 중요하다.
 한방에서는 굴에 들어있는 글리코겐 성분을 번열, 갈증의 해소에 쓰며 혈색을 곱게 하고 영양을 돕는 데 사용한다.

 쓰임새

 신선한 것은 보통 생식에 적합하고 기름에 튀기거나 굴젖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패각이 붙어 있는 굴조개는 2∼3주일간 살아있을 수 있으므로 그대로 유통할 수 있고, 굴을 따내어 냉장, 냉동할 수도 있다. 통조림으로 저장해도 무방하다.
 굴은 싱싱한 생굴을 그대로 먹는 것이 맛과 영양을 즐길 수 있어 좋다.   굴은 대체로 날것을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다. 옛부터 전해오는 이 식습관은 영양학적으로 보아도 아주 훌륭하다. 굴에 포함된 영양소 가운데 가장 주목을 받는 것은 아미노산의 한 종류인 타우린이다.   영양적으로 먹는 방법을 생각할 때 중요한 것은 그 식품에 없는 영양소를 함께 먹는 식품으로 보충하는 것이다. 여러 종류의 식품을 한꺼번에 먹게 되는 예가 '굴야채전골'이다. 이 경우도 물론 타우린과 비타민이 빠져나왔기 때문에 국물까지 남기지 말고 먹어야 한다.   굴은 또 시금치와 어울려 요리하면 더욱 효과적으로 영양섭취를 할 수 있다. 굴에 부족한 지방을 보충한다는 점에서 '굴후라이'도 있다. 튀길 때 콩기름과 같은 식물성 기름을 사용하면 콜레스테롤을 증가시키는 불포화지방산을 억제하기 때문에 더욱 영양가가 높아진다. 특히 겨울철에 나는 굴은 최고의 영양가를 보유하고 있다.

  이것이 토종

  전 세계적으로 굴과에 속하는 종류는 많으나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것에는 참굴, 바윗굴, 벗굴 등이 있다. 이 중에 참굴은 모양이 일정하지 않아, 둥글거나 가늘고 긴 것이 있으며 우리나라 전 연안에 분포한다. 바윗굴도 형태가 일정치 않으나 일반적으로 장타원형이고 남해안과 동부남해 연안에 분포한다. 그리고 벗굴은 원형에 가까운 사각형으로 남해안과 서해안에 분포한다.
 참굴은 양식종으로 많이 쓰이고 바윗굴과 벗굴은 자연산을 채취하여 이용한다. 그러나 벗굴은 생산량이 적어서 일반적으로 널리 이용하지는 않는다.
 굴은 수입이 용이하지 않기 때문에 국내 수요는 자급해야 한다. 따라서 재배기술을 개발하고 대량 생산에 힘쓴다면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토종굴로 식탁을 풍부하게 하고 우리의 건강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1.월간 {식품과 건강} 91.10월호
 2.{민족문화대백과} 
 3.{생선과 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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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물류> 

 48.한우 

 이 땅의 농부를 닮은 우공

 지난 수천 년간 이 땅의 논밭을 갈아온 한국소는 온순한 성격과 끈질긴 체질이 이 땅의 농부들과 너무도 닮아 우리가 우공이라 부르며 그림으로 그리고 글로 칭송해 왔다.
 농경생활에 바탕을 둔 우리 민족은 소를 한가족처럼 여겨왔다. 요즘이야 영농법이 기계화되어 소를 직접 농사에 사용하지는 않지만 불과 1∼20년 전만 하더라도 이른 아침에 농부들이 소를 몰고 일터로 나가는 일은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사의 하나였다.

  까마득한 소 사육의 역사

  고대의 문명국들은 일찍부터 소의 이용법을 알고 있었고 바로 이 점 때문에 생활의 터전이 잡히고 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2천5백 년,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기원전 4천∼3천5백 년,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3천5백 년경에 이미 농경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쟁기를 끄는 데 소를 이용하여 재빨리 문명국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소가 들어온 것은 기원전 1∼2세기경으로 보이는데 그 유입 경로에 대해서는 다음의 몇 가지 이설이 있다.   첫째, 한우를 비롯한 동아시아 계통의 소는 뿔이 짧다는 것을 감안할 때 그 원산지를 중앙아시아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동쪽으로 이동하여 간 것이 한우가 되고 서쪽으로 이동해 간 것은 고대 이집트의 단각우가 된 것이다.
 둘째, 세계적으로 순수한 소의 기원은 시베리아 가우에서 비롯된다. 우리나라의 한우와 일본의 화우도 이 계통에 속하는 것이다.   셋째, 중국, 우리나라, 일본의 재래소를 남아시아 계통의 소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 이를 반텡(Banteng)계통의 소로 본다.
 위와 같은 몇 가지 기본적인 학설에 대하여 일본의 학자들은 동아시아 지방에 분포한 소의 혈액형을 연구하였다. 그 결과 일본의 화우는 한우에서 나왔고 한우는 중국의 황우와는 혈통이 다르고 오히려 만주, 몽고에 이르는 아시아 대륙 중부지역의 소와 가깝다는 것을 밝혀냈다. 또한 고고학적으로는 기원전 1∼2세기 경의 유적인 김해 조개더미에서 소의 치아가 발견되어 사육연대를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 유입경로에 대한 확실한 자료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한집안 식구로 사람 대접 받은 한우

 한편 소는 생구라 불린다. 우리말에서 식구는 가족을 뜻하고 생구는 한집에 사는 하인이나 종을 말하는데, 소를 생구라 함은 사람대접을 할 만큼 소를 존중하였다는 뜻이다. 이렇게 소를 소중히 여기는 까닭은 소가 힘든 일을 도와주기 때문이며 소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소는 값이 비싸서 재산으로서도 큰 구실을 하였다. 따라서 정월 들어 첫번째 맞은 축일을 소날이라 하여, 이날은 소에게 일을 시키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쇠죽에 콩을 많이 넣어 소를 잘 먹였다. 그리고 도마질이나 방아질을 하지 않고 쇠붙이연장을 다루지도 않았다. 도마질을 하지 않는 것은 쇠고기로 요리를 할 때에는 도마에 놓고 썰어야 하므로 소의 명절날 차마 이와 같은 잔인한 짓을 삼간다는 뜻이다. 방아는 연자방아를 의미하는데, 연자방아는 소가 멍에를 매고 돌리는 것이므로 연자방아를 돌리는 것은 곧 소에게 일을 시키는 결과가 된다. 따라서 연자방아를 찧지 않던 풍속이 다른 방아에까지 번진 것이다. 쇠붙이연장을 다루지 않는 것도 소에게 일을 시키지 않는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풍속이다.

 길흉을 점치게 하는 희생물

 한편, 우리 민속에는 기형이나 털 색이 이상한 새끼가 태어나면 음양오행과 관련시켜 길흉을 예측하는 습속이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84년 고타군주가 신라 사파왕에게 청우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청우는 털 색이 검은 소로 추정되는데, 중국 문헌에 의하면 늙은 소나무의 정이 청우로 된다고 한다. 따라서 청우는 선인, 도인, 성인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고대에서 소는 무엇보다도 희생의 동물이었다. 예컨대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에 보면 '군사가 나아갈 때는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지내고 발굽의 상태를 관찰하여 그것이 벌어져 있으면 흉한 징조이고 합쳐져 있으면 길한 징조'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것은 일종의 주술적 의미로 파악되는데 시베리아나 중국에도 비슷한 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조선시대까지도 선농단을 두고 해마다 경칩 직후에 소를 잡아 임금이 친히 제사를 지냈다. 이때 제사를 지내고 난 뒤 고기를 삶아 탕으로 하여 제관들이 나누어 먹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설렁탕이 되었다고 한다.

 질 좋고 맛 좋은 한우고기

 우리나라에서는 예부터 쇠고기를 많이 먹어온 편으로 그 요리와 이용법도 상당히 발달하였으나 그 대부분이 생육용이고, 가공저장법은 외국에 비해서 비교적 뒤진 편이다.
 우리나라에서 쇠고기는 다음과 같이 쓰인다.   살 가운데 연한 부분은 회로 이용한다. 또한 굵게 저민 것을 헌이라 하며 양념간장에 찍어 먹는다.
 쇠고기구이(구)는 불고기, 불갈비 등 독특하고 훌륭한 세계적인 식품으로 발전해 왔다.
 쇠고기를 비롯한 사슴고기, 멧돼지고기 또는 말고기 등을 저장하기 위해 말려서 포로 하는 방법도 발달해 왔다. 고기를 얇게 썰어서 가미하지 않은 것을 포라 하고, 생강, 육계 등을 가미한 것을 수라고 한다.
 숙육과 편육은 소의 머리를 고아서 만든 것으로, 살코기 부분을 수육이라 하고, 머리껍질과 뼈에서 나온 젤(gelatin)을 굳힌 것을 편육이라 하는데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쇠고기 가공법이다.
 살코기를 풋고추, 마늘 등과 함께 간장에다 넣어 조린 것으로 쇠고기 장조림이 있다.
  이밖에 염통, 콩팥 등은 불고기와 수육의 재료로, 피는 선지국이나 순대의 원료로, 양, 간은 회, 곱창은 국과 곱창구이, 탕 등의 원료로, 골, 고환 등은 삶아서 술안주 등으로 버리는 것 없이 이용되어 왔다. 또한 부위에 따라서 꼬리와 엉덩이뼈 등은 곰탕, 갈비는 갈비탕, 네 다리는 족탕, 그리고 여러 가지를 섞은 설렁탕 등으로 쓰였다.

 이것이 토종

 한우는 세계에서 유일한 우리나라 고유의 역용종으로, 수천 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독특한 품종이다. 이 땅의 농부들과 심성이 닮아서 성질은 온순하고 인내심이 강하면서도 영리하다. 털색은 적갈색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가 있고, 체격은 북부지방의 것은 크고 남부지방의 것은 작은 편이다. 젖은 겨우 송아지를 키울 정도로 나오고 유기는 3개월 정도에 불과하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쇠고기를 식용해 왔다. 그리고 한우의 고기맛은 세계의 어떤 소보다도 좋다. 그러나 한우는 주로 농경과 만용(만용:점술용)으로 길렀으므로 고기의 생산량은 적은 편이다. 그리고 아무 것이나 잘 먹고, 특히 산과 부문의 질병이 적은 특징이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에 순수한 한우가 몇 마리나 남아 있을지 의문이다. 순수 한우는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좀처럼 구별하기 어렵다. 아직까지 종자 보존이 제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색깔이나 모양이 현저히 다른 몇 마리의 소를 제외하고는, 세계적으로 그 순수성을 인정받았다고 하는 한우를 아마추어가 구분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육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한우 외에, 체구가 작고 털빛이 검거나 누런 제주소도 순수한 토종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멸종해 버리고 없다. 다만 한라산의 깊은 산중에 가끔씩 야생 제주소가 출몰한 것을 보았다는 목격자의 증언이 있긴 하지만 구체적으로 확인되지는 않았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제주소는 1천8백여 두가 사육되었는데 불과 10년 사이에 하나의 종자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한우와 달리 수입 쇠고기에는 성장호르몬제인 디에틸스틸베스트홀이라는 물질이 함유되어 있는데 이것은 질암이나 남성 유방암을 일으킬 수 있는 무서운 물질이다. 디디티(DDT), 디엘드린 등의 살충제도 잔류되어 있다.
 국가 간의 관계는 힘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 같은 강대국에서 쇠고기가 마구 들어오는 현상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전체적인 교역 조건을 고려하여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쇠고기 수입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한우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온국민들이 수입 쇠고기를 철저하게 거부한다면 수입 쇠고기가 발붙일 곳이 어디 있겠는가. 

  *참고자료
 1.{토종을 찾아서} KBS 영상사업단 방영자료 
 2.{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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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오리 

 현대인의 공해독을 풀어주는 명약 

 신라시대나 고려 시대에도 오리를 길렀다거나 임금에게 진상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오리가 사육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리고기는 다른 고기에 비해 그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음도 사실이다. 이를테면 '닭 잡아 먹고 오리발 내민다'는 속담이 있어 맛없고 실속 없는 고기로 상징되고 있으며, 닭처럼 제사상에 오르지도 못했다.   어디 이것 뿐인가. '오리 궁둥이'하면 엉덩이가 못생긴 사람을 비유하는 말이며 '미운 오리새끼' 라는 말도 생겨났다. 어느 구석을 뒤져 보아도 오리가 사람들에게서 귀염을 받은 흔적은 없다. 오리가 이처럼 푸대접을 받게 된 것은 오리고기 특유의 누린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근 들어 부쩍 오리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고 있다. 건강식품의 바람을 타고 오리고기의 인기가 상승하고 있으며 그 털은 오리털 잠바로 겨울의류의 주종을 이루고 있을 정도다. 이에 따라 오리에 대한 연구도 활발해져서 오리고기가 영양 면에 있어서 쇠고기나 돼지고기에 결코 뒤지지 않고 성인병 예방에 상당한 효과가 있다는 사실도 속속 밝혀지고 있는 추세다.

 날 수 없는 새, 집오리

 엄밀하게 말하면 오리는 집오리뿐만 아니라 야생하는 오리류 전체를 가리킨다. 또한 오리의 사촌쯤 되는 기러기과와 정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종도 있다. 전세계적으로 오리과와 기러기과에 속하는 새는 146종이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36종이 발견되었다. 이 중에서 우리나라에 철따라 오고 가는 오리는 27종에 달하고 텃새인 흰뺨검둥오리와 원앙 등 2종만이 우리나라에서 번식을 한다.   이처럼 물오리, 청둥오리, 집오리 등 여러 종이 있지만 이 중에서 진짜는 집오리다. 물론 집오리도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청둥오리가 조상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야생의 물오리나 청둥오리와는 다른 환경에서 정착해 왔으므로 전혀 다른 하나의 품종으로 형질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마침내 날개가 퇴화되어 버렸고 이제는 둔한 몸짓으로 기우뚱거리며 걸어다닐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 즉, 날 수 없는 새가 되고 만 것이다.
 집오리는 오리과에 속하는 집짐승이며, 모양은 물오리와 비슷하지만 물오리에 비해서 몸체가 크고 날개는 약하다. 그리고 머리가 둥글고 부리가 넓적하다. 또한 꽁지의 지선에서 나오는 기름을 깃에 바르며 발가락 사이에 물갈퀴가 있고 물을 좋아한다. 곡물, 어패, 수초 따위를 먹으며 초봄에서 여름 사이에 계속 알을 낳다가 8월 경부터 점차 줄어들어 이듬해 봄까지 휴산한다. 오리 새끼는 약 두 달 가량이면 어미만큼 자랄 수 있다. 

 옛 문헌에 나타난 집오리의 실상

 옛 문헌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오리는 집오리를 지칭하며 우리말로는 오리, 올이, 올히로 불렀으며 한자어로는 집오리를 압, 물오리를 부라 하였다. 집오리는 원래 야생의 청둥오리를 중국에서 가축화한 것으로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2천년경의 문헌에서도 오리가 언급되고 있다고 한다.
 한편,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따르면 신라와 고려에도 오리가 있었고 일본에는 3세기경에 전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조상들은 이보다 훨씬 전에 오리를 기르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문헌에 따르면 고려에는 싸움오리도 있었다고 한다.
 {지봉유설}에는 '닭과 오리는 가축이어서 잘 날 수 없고, 그밖의 들에서 사는 새들은 모두 잘 날 수 있다'는 송나라 왕규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그리고 '집오리도 들판이나 물에서 오랫동안 놓아 기르면 멀리 잘 날 수 있다. 아마도 가축이 잘 날 수 없는 것은 마시고 쪼아먹는 것이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동의보감}의 <탕액편>에는 오리의 성질과 약효를 밝히고 있는데, 집오리의 기름, 피, 머리, 알, 흰오리고기, 흰오리똥, 검은오리고기의 성질과 약효를 언급하고 있다. 특히 들오리의 고기는 '성이 양하고 독이 없다. 위기를 화하고 열, 독, 풍 및 악창절을 다스리며 배, 내장의 모든 충을 죽인다. 9월 후부터 입춘 전에 잡은 것은 크게 보익하며 집오리보다 훨씬 좋다. 그리고 조그마한 종류가 있는데 이것을 도압이라 하여 맛이 가장 좋고 이것을 먹으면 허를 다스린다'고 하였다.

  모질고 강한 생명력

  집오리는 더러운 개천이나 폐수가 흐르는 하천 등지에서 산다. 그러나 거의 질병에 걸리는 일이 없으며 성장이 빨라서 번식도 용이하다. 또한 특별히 먹이를 주지 않아도 저 혼자 논이나 늪, 개울 등을 돌아다니며 물 속의 어류, 곤충 등을 잡아 먹고 그것도 없으면 잡초를 뜯어 먹고 산다. 이렇게 살아도 오리는 좀처럼 병에 걸리는 일이 없으며, 심지어는 쥐약 같은 독약을 먹고서도 일단 배설만 해버리면 불사신처럼 다시 살아난다. 조금 잔인한 이야기지만 사람이 잡아 먹기 위하여 털을 뽑고 목을 잘라 놓아도 오리는 한참 동안 목숨이 끊기지 않고 바둥거린다. 오리는 이처럼 대단히 생명이 질긴 동물이다. 따라서 다른 가축에 비해 사육하기 쉽다. 하천이나 풀밭 등 아무 데나 풀어놓기만 하면 알아서 잘 먹고 잘 크기 때문이다.

 새롭게 인식되는 오리의 약성

 이렇게 흔하고 천대받는 오리지만 영양 면에서는 결코 닭고기나 돼지고기에 뒤지지 않는다. 오리는 매우 실용적인 가축이다. 단지 고기에서 노린내가 나기 때문에 사람들의 구미를 쉽게 끌지 못할 뿐이다. 오리고기의 주성분은 단백질과 지질이며, 이밖에도 회분, 칼슘, 마그네슘, 인, 철, 나트륨, 칼륨 등을 조금씩 포함하고 있다.   또한 오리기름에는 인체에 필요한 필수 지방산인 리놀산, 리노레인산 등이 함유되어 있다. 이 성분은 콜레스테롤 형성을 억제하고 혈액순환을 도와준다. 따라서 동맥경화, 고혈압 같은 성인병에 효과가 있다.
 오리고기는 특유의 노린내가 있어서 식용 면에서 닭고기나 돼지고기보다 천대받아 왔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생강, 마늘, 파 등을 넉넉히 넣고 깻잎이나 미나리, 양파 같은 야채를 사용하면 노린내를 제거할 수 있어서 식용으로도 손색이 없다.
 무엇보다 오리의 뇌수 속에는 매우 강한 해독제가 들어 있는데, 이것은 명태보다도 해독력이 강하다. 오리가 일반 해독제와 다른 점이 있다면 단순히 해독만 하는 것이 아니라 원기를 보충해 준다는 것이며, 특히 어떤 약재와 배합해 사용해도 부작용이 없다는 점이다.
 오리는 농약독이나 화공약독을 해독하는 데 최고의 약이라 한다. 그러므로 공해에 찌들어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정말 반가운 약이다.
그리고 어떤 암이든 치료하기 위해서는 오리가 필요한데 그것은 오리가 인체 내의 독을 풀어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산 김일훈의 저서 {신약}의 처방에는 토종 집오리가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오리는, 청강수나 양잿물 같은 독약을 먹여도 고통은 심하게 받지만 결코 죽지 않는다. 이런 점으로 보아 오리의 뇌 속에 들어 있는 해독제의 위력이 얼마나 강한 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1.월간{신약} 
 2.{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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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염소 

 정력에 좋은 수염있는 소 

 염소는 소과에 속하는 짐승으로 면양과는 전혀 다른 종이다. 그러나 한자로 표기할 때 '양'으로 쓰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양과 염소를 혼동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면양과 구분하기 위해 요즘에는 산양(산양)으로 통용된다. 순수한 우리나라 말로는 지역에 따라 염생이, 또는 얌생이 등으로 부른다.
 염소는 양처럼 털이 감겨 있지 않고 턱에 수염이 있다. 다른 동물에 비해 독특한 수염이 나 있기 때문에 '염소' 또는 '염우'라 하였다. 수염 있는 소라는 뜻이다.
 뒤로 구부정하게 휘어진 뿔, 짧은 꼬리, 쫑긋한 귀, 그리고 소처럼 수심 가득한 눈망울 등은 그지없이 순하게 보일 뿐이다. 그러나 실제로 염소는 성질이 매우 급하고 체질이 강한 편이다. 또한 좀처럼 병에도 걸리지 않고 물을 별로 먹지 않으므로 마른 풀이나 나무 껍질만 있으면 저 혼자 갉아 먹으면서 잘도 큰다. 그래서 염소는 키우기가 쉽다.
 염소가 가축화된 기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해 온다. 즉, 3천5백여 년 전에 이란의 유목민족이 최초로 가축화했다는 설과 기원전 3천년경에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이 염소를 가축화 했다는 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염소를 집짐승으로 사육하게 된 것은 서기 전 2천년경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에 염소가 언제부터 사육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다만 문헌이나 유적을 통해 추측해 볼 때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 삼한시대 말쯤에 유입되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재래염소가 분포한 상태로 보아 중국 동부 연안으로부터 우리나라 서해안 지방으로 직접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사실은 일본 동물학자들의 연구결과를 통해서도 뒷받침되고 있다. 이들에 의하면 우리나라 재래염소는 대만 서부 지방과 중국 광동지방의 흑색염소와 유기적인 관련이 있다고 한다. 

 쓰임새

 따뜻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 흑염소는 허약체질이나 소모된 체력을 보강할 때 애용되는 식품이다. 임산부나 회복기의 환자, 그리고 어린이에게도 좋으며 특히 세포의 노화를 방지하고 불임을 막는 작용을 한다. 
 또한 허리나 다리가 저리고 아플 때 복용하면 신장기능을 보호하는 효과가 있다.
 예로부터 민간에서는 늑막염이나 폐결핵 환자에게 영양을 섭취하게 하는 식품으로도 널리 이용되어 왔다. 그러나 지방 섭취가 과다한 현대인들은 흑염소를 복용하는 것을 일단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감기로 몸에 열이 날 때도 삼가는 것이 좋다.
 흑염소를 잡아서 푹 곤 뒤 각종 한약제를 넣어 달인 흑염소탕이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다. 이밖에도 흑염소 고기에 들깨, 미나리, 토란줄기, 파, 마늘, 고추 등으로 양념하는 흑염소 구이도 미식가들이 애용하는 흑염소 요리이다.
 건강원, 보양원 등의 이름으로 성업중인 시중의 흑염소집에서 달여주는 흑염소는 보통 30만원선이고 대략 한 달 정도 복용할 수 있는 양이다. 

 정력의 화신 

 한편, 염소탕은 개고기와 함께 정력제로 알려져 왔다. 특히 전라도 지방에서는 염소탕을 보신탕이라 부를 정도이다. 그리고 염소 중에서도 흑염소를 주로 탕의 재료로 쓴다. 세계를 정복한 칭기즈칸도 염소를 재료로 한 특수요리를 즐겼다고 하며 아프리카산 염소요리는 세계적인 고급음식으로 서양 상류계급 사람들도 어쩌다 한 번씩 맛보는 정도라고 한다.
 이와 같이 염소가 정력제로 각광을 받아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발정기가 오면 수컷 염소들은 서로 암컷을 독차지하기 위해 처절한 싸움을 벌인다. 이때 수컷의 뿔은 무기로 변하고 심지어는 어린 새끼까지도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멀리 쫓아 버린다. 아뭏든 앞에 수상한 놈이 나타나기만 하면 피투성이가 되도록 격투를 벌이는 것이다. 이러한
발정기는 가을에서 겨울 사이에 주로 나타나는데 한동안 3주일 간격으로 반복된다. 이처럼 암컷에게 목숨 걸고 덤비는 염소의 생태를 보고 난 인간들이 가만있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염소는 다른 동물에 비해서 교미하는 방법이 조금 특이하다. 염소는 극히 짧은 시간에 교미를 하지만 여러번 거듭 반복한다. 보통 다른 동물들은 암컷은 대부분 수동적이며 교미 중에 조용하지만 염소의 경우는 암놈이 전적으로 주도권을 휘두른다. 단지 교미하는 순간뿐만 아니라 프로포즈에서부터 마지막 절정에 이를 때까지 무려 두 시간 동안이나 줄곧
암놈이 주도한다. 말하자면 염소탕을 먹으면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도 강해질 것이라고 연상되었고, 그래서 염소처럼 화끈한 성생활을 즐겨보자는 인간들의 속셈이 염소탕을 보신탕의 지위로 올려놓은 것이다.

 이것이 토종

 염소는 사용하는 목적에 따라 여러 종류가 사육되고 있다. 예를 들면 젖을 얻기 위한 유용종으로는 자넨(Saanen)이 있고, 털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기르는 것에는 앙고라(Angora), 캐시미어(Cashimere) 등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젖이나 털을 얻기 보다는 주로 식용, 약용으로 하기 위하여 사육되어 왔다. 이러한 품종으로는 흑색과 백색, 그리고 갈색 계통의 것이 있다. 이중에서 육용이나 약용으로 가장 널리 이용되는 것은 키가 작고 털빛이 검은 흑염소이다.   흑염소는 일 년 내내 번식이 가능하고 병에 강하며 발톱의 질도 견고해서 재래 토종으로 육종하기에 적합한 형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들을 이용하여 육성, 발전시키려는 의도가 없어서 해마다 사육 두수가 감소하고 있는 추세다.   흑염소는 몸에 좋은 보양약이 된다고 알려짐에 따라 수요가 끊임없이 늘고 있다. 그리고 전문적으로 흑염소를 중탕으로 달여주는 상점도 여기 저기 생겨나고 있다.

 음양곽 먹고 자란 약산도 흑염소

 흑염소는 섬 지방에서 자란 것을 최고로 친다. 그래서인지 전남 완도군의 '약산도 흑염소'는 예부터 그 약효가 뛰어나기로 널리 알려져 왔다. 그리고 옛날에는 이 약산도에서 자란 흑염소가 궁중의 보약으로까지 쓰였다고 한다. 약산도 흑염소가 이처럼 각광을 받게 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즉, 약산도는 지명 그대로 약초가 많이 나는 곳이다. 그래서 이 지역의 흑염소는 삼지구엽초 등의 약초를 뜯어먹고 자란다.
삼지구엽초는 음양곽이라 하여 한방에서 빠질 수 없는 약재로, 이것을 뜯어먹고 자란 흑염소는 혓바닥이 거무스름 하다고 한다.   음양곽은 정력의 풀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입증하는 예가 중국의 옛 일화에서 나온다. 옛날 중국의 어느 초원지방에서 양을 치는 목동이
있었다. 그는 양을 치다가 우연히, 숫양 중의 몇 마리가 유독 많은 암컷을 거느리고 하루에 백 회가 넘는 교미를 하며 실로 무서운 정력을 과시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을 이상히 여긴 목동은 이러한 숫양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숫양들이 산골짜기로 들어가서 어떤 풀을 열심히 뜯어 먹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이것을 본 목동도 그 풀을 뜯어 먹어 보았다. 그랬더니 그도 역시 갑자기 정력이 왕성해지는 것이었다.
 그 뒤부터 이 풀의 이름을 음양곽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과학적인 실험을 통해서도 음양곽에는 에피메딘이라는 배당체가 들어있어서 이것이 체내에 들어가면 성호르몬의 분비를 촉진시키고 정수를 풍부하게 해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우리나라 약산도의 흑염소들이 바로 이같은 약초를 뜯어먹고 자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지역의 흑염소는 당연히 그 약효를 인정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참고자료
 1.안덕균 감수, {한방요리}, 예음, 91.10) 
 2.{민족문화대백과} 633쪽
 3.{약용음식물 백선} 
 4.{장터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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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토종닭/오골계 

 토속적인 삶 속에 뿌리 내린 영물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좋은 닭이 나는 나라로 알려져 왔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수탉의 홰치는 소리를 들으며 새날을 맞이했다. 또한 닭을 상서로운 짐승으로 여겼으므로, 닭에 얽힌 설화나 전설이 오늘날까지 숱하게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액을 막고 재앙을 쫓는 상징으로 삼았다.   이처럼 닭은 모든 생명을 깨우는 전령사였으며 우리 겨레의 토속적인 삶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린 영물이었다.   닭이 제 때에 울지 않으면 불길한 징조로 여겼으며 초저녁에 울면 재수가 없고 해진 뒤나 한밤중에 울면 집안에 우환이 생긴다고 했다. 거기에 덧붙여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얘기도 있다.   흰닭을 삼 년 기르면 귀신이 된다는 속설도 전해 내려온다. 이것은 닭을 신과 통하는 짐승으로 여겼다는 증거이다.
 옛날에 어떤 사람은 십 년 묵은 닭을 기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이 닭이 요망스럽게도 주인에게 "밤새 안녕히 주무십시오"라며 인사를 했다. 주인은 깜짝놀라 이 닭이 정말 귀신이 되려나 보다고 생각하며 문틈으로 둥우리를 지켜보았다. 밤이 깊어지자 둥우리에서 뛰어내린 닭은 몇 번 재주를 부리더니 예쁜 여자로 둔갑하여 산으로 올라갔다. 주인이 살금살금 뒤를 따라가 보았더니 여자는 여우굴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우에게 말했다.
 "우리 주인집에 내려가 세 번만 울어주면 지금까지 내 자식들과 알을 다 먹어치운 주인을 죽일 수가 있으니 도와주시오."
 그러자 여우는 "그까짓 것 어렵지 않지만 내가 울 적에 절구에 찧은 붉은 팥잎이 내 귀에 박히면 죽고 말아" 하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 말을 들은 주인은 재빨리 집으로 내려와 붉은 팥잎을 절구에 찧어 손에 쥐고 기다리다가 여우가 내려와 울려고 하자 팥잎을 여우의 귀에 넣었다. 여우는 그 자리에서 곧 죽어버렸고 여자는 다시 닭으로 변해 둥우리로 올라갔다. 그래서 주인은 "요놈의 닭아, 너를 씨닭이라고 오랫동안 살려두었더니 나를 죽이려 들어!" 하며 목을 졸라 잡아먹여 버렸다.
 이처럼 닭은 우리 선조들에게 무서운 존재로 인식되기도 했다.
 닭은 그 용도에 따라서 난용종, 육용종, 난육겸종, 애완종, 투견종 등이 있다.
 요즘은 장미계 등 토종닭이라 할 수 있는 품종이 급격히 줄어들어 멸종 위기에 놓여 있고 그 대신 많은 알과 고기를 얻기 위한 외국품종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다리가 가늘고 푸르며 알을 잘 품고 병아리를 잘 거느리는 우리 토종닭은 정녕 멸종되어 버리고 말았는가.

  토종오골계, 털빛 하얀 '골흑자'

  고대국가의 건국설화에는 닭과 얽힌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경주김씨의 시조인 김알지는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계림의 전설이 있으며 신라 탈해왕 때는 나라 이름을 계림이라 부르기도 했으며 신라의 화랑들은 수탉의 깃털을 머리에 꽂아 용맹스러움의 징표로 삼았다. 이처럼 닭은 예로부터 신성한 동물로 여겨졌다. 그래서 새벽을 알리는 수탉의 울음은 희망과 풍요의 상징이었으며 새해 첫날에는 닭과 호랑이 그림을 벽에 붙여 잡귀가 물러나기를 기원하기도 하였다.   또한 우리나라는 예부터 '닭의 나라'로 알려졌는데 {삼국지} 중 [위지동이전]에 보면 '한나라에 꼬리가 긴 닭이 있다'는 기록이 있으며 {후한서}에는 '마한에는 꼬리가 5척이나 되는 닭이 있다'고 나온다. 이밖에도 중국의 옛 의서에는 우리나라 닭에 대한 내용이 자주 나오며, 한결같이 고기맛이 좋고 약성이 뛰어나다고 칭송하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칭송받던 우리 토종닭도 외래 품종에 밀려 지금은 자취를 감추고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희귀한 품종이 하나 보존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오골계이다. 오골계는 그 생김새가 보통 닭과는 달리 살과 뼈는 물론 내장까지 온통 까맣다. 마치 까마귀처럼 검다고 하여 '오골계'라고 부르며 '골흑자'라고도 한다.
 인간이 닭을 기르기 시작한 역사는 분명치 않으나 대략 6천년쯤 전으로 추측된다. 동아시아 밀림 속에 자생하던 '개루스개루스'라는 들닭을 잡아다 기른 것이 사육의 시초라 한다. 오골계도 보통 닭처럼 이 들닭이 선조이며 여기서 갈라져 나온 품종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오골계가 순수한 종자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일제 강점기인 192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는 경상남도 동래군 기장면 대라리의 오골계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였다. 그러나 해방이 되면서 방치한 까닭에 거의 멸종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다시 1962년에 동래군 기장면 대라리 산 2번지에 사육되고 있던 오골계를 다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였으나 경제성이 떨어지고 번식력이 약한 까닭에 사육 부진으로 천연기념물 지정 자체가 해제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 오골계는 털빛이 희고 깃털이 다리를 덮는 오골계의 표준품종이었는데 지금 우리나라에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이후 1980년에 충남 연산의 털빛이 까만 오골계를 천연기념물 265호로 지정하여 보호해 오고 있다.
 연산 오골계는 백색 오골계보다는 질병이 적고 체질도 꽤 튼튼한 편이다. 옛 토종 오골계와 같은 품종인 흰빛 오골계는 멸종되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이 연산 오골계를 재래종 오골계로 친다. 그러나 품종이 재래종 오골계라 할지라도 철망 속에 가두어 놓고 외국산 배합사료를 먹여서 키운 것은 토종이라고 할 수 없다. 시골집 마당에 내먹여서 병도 없고 알도 잘 까는 닭이 진짜 토종닭이라고 할 수 있다.

 연산오골계의 담백한 고기맛

 아직까지는 오골계에 들어있는 약효 성분이 무엇인지 체계적으로 연구된 바는 없다. 그래서 오골계의 약성이 무엇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대부분 고기의 맛과 성분은 먹이에 따라 차이가 난다. 좁은 닭장에 가두어 놓고 외국산 배합사료와 항생제를 먹여 키운 닭과 집 주위에 놓아 먹여서 풀씨나 벌레, 푸성귀, 곡식 등을 주워먹으며 자란 닭은 고기의 맛과 성분이 크게 다르다.
 오골계 또한 먹이의 종류에 따라 맛과 약성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솔밭이나 대밭에 놓아 키운 것을 으뜸으로 친다. 이렇게 놓아서 키운 오골계는 솔씨, 송충이, 작은 벌레, 개구리 등을 잡아먹고 자라므로 양계장에서 키운 것과는 견줄 수 없을 만큼 튼튼하고 알과 고기맛, 약효 등이 우수하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오골계의 고기에는 메타오닌이라고 하는 필수 아미노산을 비롯하여 단백질이 풍부하게 들어있다. 그리고 옛 의서인 {동의보감}에 의하면 오골계는 보신, 보간, 보허에 좋고 정력을 좋게 한다.
 오골계의 검은살은 쫄깃거리고 씹을수록 단맛이 난다. 뿐만 아니라 분명 육류임에도 불구하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름기가 없어서 국물이 뽀얗고 말갛게 우러나며 맛 또한 담백하다. 지방이 적으므로 소화, 흡수가 잘 됨은 물론이다.

  약효 뛰어난 오골삼계탕

  옛날 조선시대 양반들이 즐겨먹던 육개장이나 삼계탕 등의 보신음식들은 오늘날까지 인기가 있는 별미인데, 특히 영계에 백삼, 황기, 마늘, 찹쌀 등을 넣고 푹 고아서 먹는 삼계탕은 누구의 입맛에나 잘 맞는 초여름의 별미이다. 그런데 이 삼계탕 중에서도 가장 약성이 뛰어난 것이 바로 오골삼계탕이다. 즉, 오골계를 사용한 삼계탕이다.
 그리고 오골계는 고기나 알을 얻기 위해서보다는 보통 약으로 쓰기 위해 길러왔다. 신경통, 부인병, 피부병 등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졌으며 그 때문에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오골계는 간과 신장이 허약한 증상을 개선하는 약으로 쓰인다. 오골계에 인삼, 대추, 밤, 생강, 흰 도라지, 천궁, 찹쌀을 넣어 곤 오골삼계탕은 신장허약에 효험이 탁월하다.
 또한 중풍으로 언어장애나 반신불수가 되었을 때도 오골계의 살을 발라 파, 후추, 소금, 생강, 식초, 간장을 넣고 탕을 끓여 마신다.
 닭의 흰 똥은 계분백 또는 계시백이라고 하는데 갈증을 멎게 하고 오줌을 잘 나가게 하고 유뇨증을 치료하며 악창을 낫게 하는 약으로 써 왔다. 또한 토종닭의 계분백은 신장암, 신부전, 신장염, 전립선염 등을 치료하는 신약이 된다고 하였다.
 이밖에도 오골계를 이용한 한방처방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부인들의 대하나 자궁출혈에는 오골계에 당귀, 황기, 생지황, 숙지황, 향부자, 복령, 인삼, 육계, 지골피를 넣고 진하게 달인 다음, 오골계의 뼈를 볶아 가루를 내어 한데 섞어 환으로 만든 오계전환을 쓰면 효과가 있다. 그리고 몸이 수척해지고 입이 마르고 잠잘 때 땀을 흘리는 증상에는 뼈를 찧고 갈아 가루를 내어 알약으로 만든 오계환을 쓴다. 

 이것이 토종 

 토종 오골계는 천연기념물 제 265호로 지정되어 충청남도 논산에 있는 연산 오골계 농장에서만 지정 사육되고 있다. 이렇게 귀한 까닭에 토종 오골계는 다른 지방에서 만나기 어렵다. 충청도 지방에서도 오골삼계탕을 전문으로 하는 집은 드물다.
 통상적으로 오골계는 보통 닭보다 몸집이 조금 작고 볏은 검붉은 색깔로 맨드라미꽃과 닮았다. 또한 깃털이 발목까지 내려와 다리를 덮고 있으며 발가락이 보통 닭보다 하나 더 많은 다섯 개다.   오골계라고 다 털이 검은 것은 아니다. 털이 흰 것도 있고 점박이도 있다. 또한 가슴부분만 붉은 털이 난 것도 있다. 이처럼 종류가 다양하기 때문에 오골계는 그냥 보아서는 보통 닭인지 오골계인지 분간하기가 무척 어렵다. 그러나 이들의 공통점은 뼈가 검다는 것이다.   토종 오골계는 충청도에서 나는 것인 만큼 오골삼계탕은 충청도의 토속적인 맛을 낸다. 예부터 충청도 사람들은 그 기질이 순하고 소박하므로 음식 역시 구수하고 넉넉했다. 충청도는 농업이 주가 되는 지역이라 쌀, 보리, 고구마, 무, 배추 등 농산물이 많이 나고 해산물은 서쪽 해안지방에서나 나왔으며 산채나 버섯, 호박 등을 이용한 음식이 식단의 대부분을 차지해 왔다. 특히 보리를 덖어서 지은 보리밥과 청국장이 이 지방 최고의 음식이었으니 오골삼계탕이야말로 이 지방 사람들이 내세울 만한 사치스런 음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사치스럽다고 하더라도 이 지방의 본성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아서 양념도 그리 많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맛을 한껏 살리고 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예나 지금이나 토종오골계가 귀한 탓에 서울 시내에서도 이 오골삼계탕을 찾기는 쉽지가 않다. 오골삼계탕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있지만 공급받을 수 있는 오골계의 수는 극히 한정되어 있다. 즉, 충남 연산의 오골계 농장에서 사육하는 오골계의 지정된 마리수에서 초과하는 수효만큼만 오골삼계탕의 재료로 쓸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오골계마저 대만, 중국 등지에서 수입되고 있다. 따라서 이 수입 오골계를 재료로 한 오골삼계탕집이 여기저기서 생겨나고 있다. 그리고 수입한 오골계의 종자를 국내 여러 곳에서 사육하기도 한다. 덕분에 그 귀한 오골삼계탕을 일반인들이 맛볼 수 있는 기회는 넓어졌지만 순수한 토종오골계의 종자는 위협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참고자료
 1.월간 {식품과 건강} 91.8월호 p.34
 2.월간 {시사춘추} 92.10월호
 3.월간 {신시}


 52.토종 돼지

 제사상에 머리 올리는 부와 재물의 상징

 돼지는 일찍부터 제사상의 희생물이었다. 우리의 유구한 역사 속에는 돼지머리를 제천의식에 사용하였던 기록들이 종종 나온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제천의식에 쓸 돼지를 도망가지 못하도록 돼지다리를 끊어버린 사람을 왕이 처형했다는 기록이 있다. 신성한 희생물에 흠집을 냈다는 죄목이었다.   또, {삼국사기}에도 '고구려는 항상 삼월 삼일에 낙랑의 구릉에 모여 사냥하고 돼지와 사슴을 잡아 하늘과 산천에 제사한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동국세기}에도 산돼지가 조선시대 납향에 제물로 쓰였다는 기록이 있다. 오늘날에도 큰 굿을 할 때나 잔치 때는 돼지를 희생으로 쓴다. 돼지머리만을 제물로 쓰는 경우가 많지만 통째로 쓰기도 한다.   돼지는 전통민간신앙에서 지신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상해일에 궁중에서는 나이가 젊고 지위가 낮은 환관 수백 명을 동원해서 횃불을 땅 위로 이리저리 내저으면서 '돼지 주둥이 지진다.'고 하며 돌아다니게 하였는데, 이는 풍년을 비는 뜻이라고 하였다. 
 한편 돼지에 관한 속신도 많다. 예컨대 임산부가 돼지고기를 먹으면 아이의 피부가 거칠고 부스럼이 많다고 하며, 산모가 돼지발을 삶아먹으면 젖이 많이 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돼지꼬리를 먹으면 글씨를 잘 쓰게 되고 꿈에 돼지를 보면 복이 오고 재수가 좋다고 한다. 돼지꿈을 꾸면 재물이 생기는데 이것은 돼지를 지칭하는 한자의 음이 돈(돈)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기실 돼지는 야생하던 멧돼지를 잡아다 사육한 것이다. 그리고 그 사육의 역사는 중국,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등지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돼지 사육의 역사는 정확한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중국의 옛 문헌에서 우리나라와 관련된 기록을 통해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삼국지} 부여조에는 저가라고 하는 관직명칭이 나오는데, 이 사실로 미루어 우리나라에서는 약 2천년 전에 돼지를 사육하기 시작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 재래종은 조선시대 말엽까지 사육되어 오다가 외래종이 도입되면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돼지는 기후, 풍토에 대한 적응력이 매우 강해서 전세계적으로 1천여 품종이 분포되어 있다. 유럽 중, 남부와 아프리카 북부에서 야생하는 유럽산 멧돼지, 중국대륙 동부에서 우수리강 유역에 걸쳐 살고 있는 멧돼지, 동남 아시아 멧돼지 등이 각 지역마다 독특한 재래종으로 형성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재래종 돼지는 중국의 멧돼지 또는 동남 아시아의 멧돼지에서 유래되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우리가 흔히 뚱뚱하거나 많이 먹는 사람을 보고 돼지라 하는 것처럼 돼지는 일반적으로 머리부분이 작고 몸집이 뚱뚱한 편이다. 몸무게는 큰 것이 5백kg 정도에 이른다. 또한 돼지는 잡식성 동물이기 때문에 송곳니와 어금니가 모두 발달되어 있고 닥치는 대로 잘 먹는다.   흔히들 사람들은 돼지가 지저분하고 더러운 짐승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돼지는 그 조상인 멧돼지의 성질을 닮아 후각이 매우 발달되어 있다. 그래서 배설을 하더라도 냄새 나고 지저분한 곳에만 한다.
반면에 잠자리는 항상 가장 깨끗하고 마른 곳을 선택한다. 단지 돼지는 땀샘이 발달하지 못하여 소변을 많이 보게 되므로 돼지우리 주변에 습기가 많이 차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돼지우리를 만들 때 배설장소를 따로 만들어 주면 청결한 환경에서 돼지를 키울 수 있다.

  성분

  돼지고기에는 필수지방산 중 리놀산이 많이 들어있으며 그 함량은 쇠고기의 4∼5배 정도이다. 이것은 비만증이나 고혈압, 동맥경화 등을 예방 치료하는 데 좋다.   한편 돼지기름에 들어 있는 콜레스테롤 함량도 쇠기름의 절반 밖에 되지 않으며 단백질의 아미노산 조성 비율도 사람의 몸 성분에 더 가깝다고 한다. 옛 문헌에 의하면 '돼지고기는 수은과 독을 제거한다'고 한다. 

 쓰임새 

 앞에서 밝혔듯이 돼지는 오랜 옛날 제천의식의 제물로 쓰였다. 돼지가 제물로 쓰였다는 것은 당시에 돼지고기를 식용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돼지고기는 잘 먹어야 본전'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일부 나라에서는 금기시한 경우도 있었다. 물론 이것은 터무니없는 금기이다.
 돼지고기의 효능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하나는 돼지고기에 약간의 독성이 있으므로 다른 음식과 화합하여 인체에 해가 될 수 있다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돼기고기가 약이 된다는 견해이다. 매실, 도라지, 연뿌리 등과 돼지고기를 같이 먹으면 설사가 나고, 메밀과 같이 먹으면 머리카락이 빠진다고 한다. 이것은 돼지고기에 독성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견해이다.
 이밖에 돼지고기와 함께 먹으면 좋지 않은 금기식품으로는 화채, 붕어, 계란, 노란 콩, 자라고기 등이 있다. 화채와 함꼐 먹으면 치질이 생기고, 붕어, 계란, 노란 콩 등과 같이 먹으면 기가 체하고, 자라 종류의 고기와 같이 먹으면 내장이 상하며, 특히 생강과 같이 먹으면 풍의 요인이 될 뿐 아니라 얼굴이 검어진다고 한다. 또 돼지골은 남자의 양기를 감퇴시킨다고 하였으며, 돼지고기는 고혈압의 증상인 풍의 원인이 된다고 하였다.
 한편, 돼지고기의 약효로는 돼지의 허파가 사람의 허파와 해소병에 좋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돼지의 꼬리에서 뽑은 피는 갑자기 쓰러져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내는 묘약으로 알려져 있고, 등뼈의 골수는 사람의 골수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돼지의 목덜미 살은 술에 체했을 때 얼굴이 노래지고 배가 늘어나는 증세를 막는다고 한다. 이질에는 저간환을, 탈항에는 저간산을 쓰고, 각종 피부병과 천식 등 호흡기질환에는 돼지발톱을 썼다. 돼지꼬리를 태운 재를 대머리에 바르면 머리가 나고, 돼지털을 태운 재를 깨기름에 이겨 화상에 바르면 낫는다고 한다.
 또한 돼지의 입부분은 입술의 종기나 식은땀에 좋고, 혓바닥은 비위가 약한 사람에게 좋으며, 돼지 이빨은 단오날에 태워 가루를 내서 어린이의 경기나 뱀에 물린 데, 또는 쇠고기를 먹고 중독된 데 이용하면 약효가 있다고 한다. 돼지뼈, 특히 턱뼈를 태운 재는 천연두를 앓는 아이에게 좋다.
 돼지고기를 부위별로 나누어 등심, 방아살, 어깨살, 뒷다리, 갈비 등으로 분류하는데, 지방이 적고 연한 부분을 상품으로 친다. 요즘은 갖은 양념을 한 등심이나 갈비, 그냥 구워서 소금에 찍어먹는 삼겹살을 즐겨 먹으며, 계피 등을 써서 냄새를 없앤 돼지족도 인기식품 중의 하나이다.
 그 밖에 저민 돼지간에 메밀가루를 묻혀서 기름에 지진 간전, 돼기고기를 덩어리째 삶아서 얇게 저민 수육, 편육을 비롯하여 갈비찜, 완자전 등의 음식과 순대, 서양식으로 가공한 소시지 등 다양하게 조리되고 있다. 부산물인 털은 칫솔, 옷솔의 원료로 이용되고, 가죽은 피혁으로 이용된다. 

 이것이 토종 

 우리나라에서 오랜 옛날부터 사육되어 우리 민족의 생활 속에 자리잡은 재래종 돼지는 조선시대 말엽까지 사육되어 오다가 외래종이 도입되면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꿈만 꾸어도 재수가 좋다고 하여 집집마다 그림으로 걸어놓던 부와 재물의 상징인 새까만 토종돼지는 지금 우리나라 어디를 가도 찾아보기 어렵다.   재래종 돼지는 흑색으로 몸집이 작고 주둥이가 길며 체질이 강건하여 질병에 잘 견디는 장점이 있다. 주로 산간지방에서 사육되었으나 근래에는 그 모습을 보기 어렵게 되었다. 경상북도 김천의 지례돈과 경상남도 사천의 사천돈이 독특한 형태를 간직하고 있었으나, 이 품종들도 외래품종의 도입으로 인하여 고유한 특성을 상실하였다.

 ** 참고자료 
 1.{민족문화대백과}
 2.{잃어버린 토종을 찾아서} KBS 영상사업단 제작 비디오 자료 
 3.{약용음식물백선}, 보건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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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토종벌(한봉)

 추위와 전염병에 강한 토종벌

 벌들의 나라는 꿈의 왕국이다. 그런 까닭에 이상세계를 추구하는 고대 철학자들에게 있어서 꿀벌의 삶은 하나의 연구모델이었다. 벌들의 세계는 평화롭고 민주적이며 질서정연하고 조직적이다. 또한 벌들은 꽃의 낙원에서 살고 꽃가루로 집을 지으며 꽃의 정인 꿀을 먹이로 하여 살아간다. 그들의 세계는 화려하며 아름답고 신비하다. 그래서인지 평화롭고 기름진 땅을 일컬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하였고 꿀맛은 최고로 맛있는 음식을 상징하는 말로 쓰여왔던 것이다.   벌의 왕국은 크게 세 가지 계급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마리의 여왕벌을 중심으로 수백 마리의 수펄과 2∼6만여 마리의 일벌이 완전히 다른 임무를 수행하면서 하나의 질서를 이룬다. 여왕벌은 벌왕국의 강력한 통치자로서 종족번식을 자신의 임무로 한다. 벌집을 다스리고 벌들을 감독하면서 날마다 1천5백여 개의 알을 낳는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평생을 빈둥빈둥 놀고 먹는 수펄은 여왕벌과 단 한 번의 교미를 위해서 태어난다. 그러나 실제로 여왕벌과 교미를 하려면 수백 대 일의 경쟁을 뚫어야 한다. 그리고 여왕벌의 혼인식이 끝나면 모든 수펄들은 차례로 쫓겨나거나 죽게 된다. 벌나라의 절대다수의 민중은 일벌들이다. 일벌은 본래 암컷이었으나 능력이 퇴화된 중성이며 몸집은 작지만 날쌔고 튼튼하다. 이러한 일벌들은 꽃가루를 채집하고 꿀을 모아 들이고 애벌레를 키워 후손을 양육하며 외적으로부터 왕국을 지키는 전사의 역할까지 담당한다.
 그런데 이처럼 벌들의 이상적인 삶의 모습보다 실제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꿀이다. 그 이름만 들어도 달콤한 맛이 연상되어 군침이 도는 꿀은, 사실은 꿀벌이 꽃에서 따서 저장해둔 먹이이다. 꿀에는 투명한 것과 누런 것이 있으며, 끈끈한 액체로 그 성분은 대부분이 당질이다. 식용, 약용으로 쓰이고 특히 한방에서는 위를 편하게 하고 대변을 순하게 한다
하여 약재로 사용한다. 인간이 언제부터 꿀을 이용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이미 원시 시대 때부터 이용해 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봉소, 즉 벌집이 원시시대 때의 동굴에서 발견된 적도 있고, 고대 이집트의 미이라 속에서 꿀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보면 그 역사가 꽤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꿀은 그 종류에 따라 색깔, 향미, 성분 등에 차이가 있으며, 어떤 것은 독성이 심한 것도 있다. 또 꿀을 많이 먹고 나서 속이 편치 않거나 심한 경우에는 혼수상태에 빠지는 수도 있는데, '꿀을 많이 먹으면 속에서 불이 난다'고 하는 것도 이러한 현상 중의 하나이다. 이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꿀이 삼투압 작용, 즉 수렴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특히 위궤양 같은 위장병을 가진 사람에게는 꿀이 다량의 수분을 흡수해 버림으로써 이러한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성분 

 꿀에 들어 있는 주성분은 과당과 포도당이며 이밖에 설탕, 엿당, 덱스트린 등이 포함되어 있다. 단백질, 회분 비타민 B군 등도 미량 함유하고 있다.
 꿀은 밀원에 따라서 성분에 차이가 나는데 토종꿀이 우리에게 좋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를테면 메밀, 참피나무, 밤나무 등에서 채취한 꿀은 색깔이 짙고 철분이 많다. 색깔이 옅은 꿀은 철분 함유량이 6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꽃의 화밀(꿀)을 꿀벌이 모아 농축 저장한 꿀의 주성분은 당질로서 약 80%를 차지한다. 당은 과당과 포도당이 주체로 과당이 포도당보다 더 많다. 이밖에 설탕, 엿당, 덱스트린 등을 포함한다.   꿀에는 이 밖에도 비타민 B1,B2,B6, 판토텐산, 젖산, 개미산, 철분, 칼슘 등의 성분이 다양하게 들어 있다. 특히 꿀에는 칼륨이 상당량 들어 있어 박테리아가 생존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옛날부터 꿀이 건강과 미용에 효용이 있다는 평은 비타민 B군, 특히 B6가 많고, 피부의 거칠음을 방지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철분은 메밀, 참피나무, 밤나무 등에서 얻어진 꿀에 많다. 꽃의 당분은 대부분이 설탕이지만 벌의 분비액 중의 효소인 인베르타아제에 의해서 설탕이 반전당으로 변화되므로 꿀은 흡수되기 쉬운 당질식품이다.   꿀에 들어있는 효소의 작용으로 거품이 발생하는 수가 있으므로, 여름에는 저온으로 저장해야 한다.   꿀 속의 과당은 체내의 당분 흡수를 지연시키고 흡수된 당분의 소비를 촉진시켜 혈당의 상승을 막아주며, 빨리 분해되기 때문에 신장을 편하게 하는 역할과 피로회복, 진정 작용, 보혈 작용 등도 한다.

 쓰임새

 꿀은 보통 식용하지만 이외에도 과자, 음료, 화장품의 제조에 쓰이며 한방에서는 환약(환약)을 만들 때 결합제로 쓴다.   음식물에 꿀을 이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꿀은 주성분이 환원당으로 n온도에 따라 감미도가 변하므로 조미료로는 적당하지 않다.
 설탕보다 흡수가 잘 되므로 피로회복에 효과가 좋으며 과자에 사용하면 갈색으로 변하여 먹음직한 색깔을 낼 수 있다.   변비 퇴치에도 효과가 있으며, 소화가 잘 되는 식품이므로 위장이 약한 사람에게도 좋다. 더욱이 꿀에는 비타민 B6가 들어 있어 피부가 거칠어지는 것도 막아준다.   이처럼 꿀에는 여러가지 좋은 효능이 있기 때문에 예로부터 꿀은 민간약으로 널리 이용되어 왔다. 소련의 어느 조사 연구 보고서에 의하면, 100세 이상 장수한 사람들 중 상당수가 꿀을 상식하는 사람이 아니면 양봉가였다고 한다.
 예로부터 혀에 혓바늘이 돋거나 염증이 생겼을 때, 또는 입안이 헐었을 때 꿀에 봉사(한방에서는 보통 월석이라고 한다) 가루를 녹여 발라두면 아주 효과가 좋다고 전해 온다. 또 {약성론}이라는 옛 책에도 '입안에 창이 생긴 데에는 무잎을 꿀에 담가서 물고 있으면 좋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모두 꿀의 수렴 작용을 이미 오랜 전부터 알고서 치료에 활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한방의 사상의학에서는 체질적으로 비위에 열이 많은 소양인 체질의 사람에게는 꿀이 그다지 적합한 식품이 못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자칫 비위의 열을 더욱 높여 얼굴이 붉어지게 만들고 가슴을 답답하게 하거나 피부 발진을 일으키는 등 부작용을 초래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빵 식용시에는 버터를 바른 위에 꿀을 더하여 식용하면 한층 좋은 맛을 즐길 수 있다.

 이것이 토종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벌의 종류는 무려 9백20여 종이나 된다. 그 중에서 꿀을 얻을 수 있은 것은 꿀벌과에 딸린 '양봉'과 '토종벌' 두 가지다. 토종벌이라고 부르는 동양종 벌은 가짓수가 하나뿐이지만 서양종 벌은 그 종류가 다양하다.
 흔히들 '한봉'이라 하는 토종벌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토종벌은 인도가 원산지인데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 중국, 아시아 여러 나라에 서식한다. 그러나 종은 같을 지라도 주변 환경에 따라 생태와 꿀의 질이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으므로 우리나라에서 나는 '한봉'은 우리의 특산물로 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안에서도 토종벌은 그리 흔하지 않다. 주로 강원도의 산간지대나 지리산, 덕유산 등지에 토종벌 보호구역이 설정되어 있다. 이것은 양벌로부터 토종벌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인데 양봉이 침투하면 힘이 약한 토종벌은 거의 몰살을 당하기 때문이라 한다.
 토종벌은 2천년쯤 전인 삼국시대 초기부터 사람들이 길러왔다고 한다. 먼저 고구려에서 시작하여 점차 백제, 신라 등으로 벌 치는 기술이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제의 여풍이라는 사람이 서기 6백43년에 양봉법을 일본에 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이처럼 우리 선조들이 오랫동안 길러온 한봉은 꿀의 생산량이 많은 양봉에 밀려 그 수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심지어 어떤 양봉학자들은 양봉업의 발달을 위해서는 한봉이 하루빨리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토종벌은 서양벌보다 몸집이 조금 작고 혀의 길이가 짧아 꿀을 따는 능력이 서양벌보다 떨어진다. 또한 성질이 매우 감정적이어서 날씨나 기분에 따라 꿀을 모아들이는 양이 다르다. 그리고 어려운 상황에 부딪치면 금방 의기소침해져서 일을 하지 않는다. 게다가 토종벌은 나무통을 파내어 만든 '환태식 벌통' 속에서 살기 때문에 양봉 자체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이러한 벌집의 구조 때문에 일년에 한 번씩 벌을 모두 죽여버리지 않고서는 꿀을 뜰 수 없는 치명적 약점이 있다.
 그러나 토종벌은 여왕벌에 대한 애착과 충성심이 서양벌보다 강하고 성질이 온순하여 다루기가 쉬우며 추위와 전염병에 강하다는 장점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꿀의 질인데 토종꿀이 양봉꿀보다 질적으로 훨씬 우수하다. 똑같은 꽃에서 꿀을 따온다 하더라도 양봉꿀은 한 해 동안 철따라 여러 번 뜨기 때문에 시기에 따라 꿀의 종류와 질이 다르고 물기를 말릴 겨를이 없어서 꿀이 대체로 묽다. 그러나 토종꿀은 환태식 통나무 벌통 속에 사계절 동안 피었다 진 수많은 꽃에서 따온 꿀이 위에서부터 켜켜이 들어차 있어서 꿀의 밀도가 높고, 오랜 동안 벌들의 날개짓으로 물기가 거의 빠져서 농도가 매우 진하다.
 그러므로 영양이나 약성 면에서 토종꿀이 양봉꿀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토종벌을 외면하고 도태시킬 것이 아니라 보호 육성하고 잘 활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 참고자료
 1.{약이 되는 식품}
 2.{식품사전(꿀)}
 3.월간 {시사춘추} 91.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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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한국호랑이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백수의 왕

 우리나라는 국토의 70%가 산으로 이루어진 산악국이므로 호랑이가 많이 서식하여 '호랑이의 나라'라고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때문에, 호랑이가 인간에게 끼치는 민폐가 매우 심하여 호랑이에 의하여 사람이나 가축이 해를 입는 환난을 일컬어 '호환'이라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한국호랑이는 단군왕검의 탄생설화에서부터 우리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우여곡절을 함께 해왔다. 우리 민족이 호랑이를 대하는 심성은 영물을 대하는 그것과 같아 호랑이를 의인화한 전설이나 설화 등에 많이 전해내려오고 있다. 그래서 마침내 서울 올림픽대회의 마스코트로 선정되기에 이르렀다. 호랑이는 한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동물인 호랑이는 여러 설화를 비롯하여 그림과 조각 등 미술품에도 빈번히 등장하는 등 우리민족과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다. {주역}에서는 만주와 우리나라를 지목하여 인방으로 지칭하고 있기도 하다. 

 왕처럼 의젓한 생활방식

 호랑이는 큰 몸집에 비하여 동작이 매우 빠르고 조심성이 있다. 먹이를 발견하면 소리를 내지 않고 은밀하게 접근하다. 자기 몸이 보이지 않게 걸어가는 동작과 모양은 마치 뱀이 땅 위를 기어가는 동작과 비슷하다.   먹이를 찾아서 하루 동안에 보통 80∼100km를 달리는데, 항상 뒷발이 앞발자국을 되밟는 습성이 있다. 또한 뛰는 속도도 매우 빠르고 한번 도약하면 5m 가량 뛰어오를 수 있고, 먹이를 쫓아갈 때는 7∼8m의 먼 거리를 무난히 건너뛰기도 한다. 그리고 10m 높이의 벼랑을 훌쩍 뛰어내리기도 하며, 헤엄도 잘 친다. 경사가 45˚정도로 기울어진 나무 위를 자유롭게 기어올라갈 수 있는데, 나무 위에서 내려올 때는 회전하여 머리를 밑으로 향하게 내려온다.
 이처럼 자유자재로 숲을 누비며 백수의 왕으로 군림하는 호랑이도 괴로운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여름철의 무더위다. 그래서 호랑이는 6∼7월 여름이 되면 깊은 산중의 서늘한 골짜기에서 살고 8월이 지나가면 다소 밑으로 내려와서 산다.
 반면 호랑이는 추위를 잘 견디는 편 다. 겨울에는 -30˚의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 시기가 되면 배와 겨드랑이 밑의 지방층이 5cm 정도 두꺼워진다. 그리고 눈오는 겨울밤이면 마치 개가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처럼 월광욕을 즐기기도 한다. 또한 호랑이는 밤을 좋아한다. 그러나 낮에도 수시로 먹이가 되는 야생동물을 찾아다닌다. 배가 부르면 하루종일 드러누워 낮잠을 자다가 해가 지자마자 활기를 띠고 약탈적 행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한편 호랑이는 12월에서 1월 초순경에 교미 시기가 되는데 이 시기에 수컷은 이산 저산 숲이란 숲은 모조리 뒤져서 암컷을 찾아 헤맨다. 그러다가 암컷을 발견하면 여러 마리의 숫컷은 암컷 한마리를 두고 피투성이가 되도록 대판 싸움을 벌인다. 이 싸움에서 최후의 승자가 암컷을 차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패한 호랑이들은 싸움의 장소를 떠난다.   이렇게 교미가 이뤄지면 암호랑이는 임신을 하게 되는데 뱃속에 98∼110일 정도 후에 분만을 한다. 1회에 낳는 새끼 수는 보통 3마리 정도이며 암컷은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바위로 된 동굴이나, 바위와 바위 사이에 움푹 팬 곳, 절벽의 동굴에 보금자리를 만든다. 암컷은 항상 경계를
하기 위하여 결코 일직선으로 보금자리를 찾아가지 않고 바위를 밟고 다녀서 자신의 발자국을 감추려고 노력한다. 호랑이는 새끼를 양육하는 기간에는 성질이 무척 사나워져서 엽사(엽사)에게 미친듯이 덤벼들기도 한다.
 새끼들은 생후 3년 뒤에야 좋은 서식장소를 찾기 위하여 방랑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생후 5년이 되어야 비로소 성숙하며, 수명은 40∼50년이다. 1년에 두 번 털갈이를 하는데, 검은 줄무늬와 코와 발의 털을 다른 부분보다 먼저 갈이한다. 또, 길고 날카로운 발톱도 매년 바뀌며, 바뀌는 시기는 12월 경이다.   호랑이는 식성이 까다롭다. 그래서 자기자신이 잡은 신선한 야생동물의 고기만 먹는다. 일반적으로 짐승들의 뼈가 많이 붙어 있는 곳과 내장은 먹지 않는다. 그러나 제 아무리 호랑이라도 극심하게 시장기가 들면 죽은 고기, 오래된 고기도 먹는다. 주식물은 멧돼지이며 노루, 산양, 곰, 사슴 등이다. 그리고 포식을 한 뒤에는 소화작용을 돕기 위하여 여러가지 풀과 도토리, 과실, 즙액이 많은 머루, 다래 같은 것을 먹는다.
말하자면 후식까지 먹는 셈이다.   음식을 충분히 먹은 뒤에 호랑이는 냇가로 내려가서 코와 입을 물속에 담그고 입 속에 남은 고기부스러기와 피를 깨끗이 씻는 습성이 있다.
일종의 양치질이다. 겨울에는 물을 얻기가 어려우므로 물 대신 눈으로 목마름을 면한다.

  민간신앙에서 숭배 대상

  우리 민족의 민간신앙 속에는 호랑이를 숭배의 대상으로 삼아온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예컨데 산악숭배사상과 융합되어 산신신앙으로 자리잡게 된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즉, 산을 숭배하는 사상은 산속에 사는 숭배의 대상인 호랑이와 연계되어 산신이 호랑이로 표현되는 것이다. 호랑이를 별칭하여 산군, 산군자, 산령, 산신령, 산중영웅이라고 부르는 데에도 이러한 사상이 엿보이고 있다. 오늘날에도 심마니들은 호랑이를 산신령으로 대접한다.
 그런데 산신당에는 호랑이가 사자로 묘사되기도 하고, 호랑이 자체의 모습이 산신으로 모셔지기도 한다. 그리고 산신도에 묘사되고 있는 호랑이는 무섭고 사납다기보다는 점잖고 친근하게 표현되고 있다. 호랑이의 자세도 산신의 옆 또는 앞에 다소곳이 엎드려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호랑이의 모습은 위엄이 있으면서도 애교가 있고 신성한 영물로서의 분위기와 함께 친근한 시골 할아버지 같은 분위기를 나타냄으로써 인간적인 모습으로 희화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호랑이는 풍수설에서도 중요시 되어 왔다. 동양의 음양오행사상에서는 우주를 진호하고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상징적 동물을 방위신으로 설정하고 있다. 즉, 동쪽에는 청룡, 서쪽에는 백호, 남쪽에는 주작, 북쪽에는 현무라는 이름을 가진 방위신이 있다고 본 것이다. 이들 4신은 사방을 수호하는 방위신으로 풍수지리에서는 좌청룡, 우백호, 전주작, 후현무라 하여 매우 중시되었다.
 이처럼 설화 또는 민간신앙 속에서 등장하는 한국호랑이는 무섭고 두려운 맹수가 아니라 우리 생활에 밀접한,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동물로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어리석고 의뭉스러울지라도 결코 간교하지 않은, 오히려 우직함이 돋보이는 동물로 인식되고 있다고 하겠다. 

 호랑이는 죽어서 약과 가죽을 남긴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고 한다. 호랑이의 가죽은 무척 귀한 물건으로 여겨져서 높은 값에 거래되었다. 그래서 웬만한 부자나 고관대작이 아니면 손에 넣기가 무척 힘들었다. 호랑이가 사람에게 잡히는 일도 드물었을 뿐만 아니라, 사악한 잡귀를 쫓는 신비한 영험을 가지고 있다고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호랑이 가죽은 주로 장식용으로 쓰였다. 그러나 단순한 장식이 아니고 몸을 보호하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신행 때 신부의 가마 위에 호랑이 가죽을 덮기도 하는데 이것은 인간의 즐거움을 시기한 잡귀가 새색시를 넘보기라도 할까 보아서 미리 잡귀의 범접을 막고자 한 의도이다.   한편으로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만 남기는 것이 아니었다. 호랑이의 신체 각 부위는 주술적으로, 혹은 한방이나 민간약재로 긴요하게 쓰였다.
{본초강목}에는 호랑이의 각 부위가 약재로 이용되는 예를 자세히 밝히고 있다. 예컨데 뼈는 사악한 기운과 병독의 발작 등을 멈추게 하므로 풍병의 치료제로 쓰였고 호랑이의 눈은 마음이 산란한 환자에게 쓰였다.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인광을 발휘하는 호랑이의 눈에는 사귀도 놀라 달아나게 되어 마음을 진정시키게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호랑이의 코는 미친병의 치료와 어린이 경풍에, 그리고 치아는 매독이나 종기의 부스럼에, 발톱은 어린이의 팔뚝에 붙은 병도깨비를 물리치는데, 털가죽은 사악한 귀신을 놀라게 하여 학질을 떼는데, 수염은 치통에, 오줌은 쇠붙이를 삼켰을 때 사용되었다.
 또한 단오날에는 궁중에서 쑥으로 호랑이를 만들어 신하에게 하사하는 풍속도 있었고 부녀자들은 호랑이의 발톱으로 노리개를 만들어 패용했다.

 이것이 한국호랑이

 한국호랑이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모두 25마리가 포획되었다. 1918년 강원도 춘성군 가리산에서 수컷 1마리, 1922년 경상북도 경주군 대덕산에서 수컷 1마리, 1946년 평안북도 초산에서 1마리를 잡은 것을 마지막으로 멸종되고 말았다.
 한국호랑이는 크고 날쌔며 털가죽의 무늬가 최고로 아름답다. 또한 털의 질도 인도산보다 훨씬 좋은 듯이 보이며 노란색이 적고 그 대신에 흰 무늬가 있다. 그러나 검은 줄무늬는 열대산과 같이 뚜렷하며 꼬리는 더 길다.
 한국호랑이의 평균 몸무게는 120∼150kg 정도이고 꼬리를 포함한 몸길이는 2.5m에 달한다. 잔등의 색깔은 선명한 누런 밤색이고 24개의 검은 띠줄이 서로 연결되어 어룽더룽하다. 또한 배에는 흰색 바탕에 5개의 검은 줄무늬가 그어져 있는데 다른 호랑이보다 줄의 폭이 넓고 뚜렷하며 이마에는 검은 무늬로 임금'왕'자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어 '백수의 왕'임을 과시하고 있다.
 전 세계의 동물원에 있는 호랑이 중에서 한국호랑이로 보이는 것은 150여 마리다. 그러나 정작 남한의 동물원에 있는 호랑이 30여 마리 중에는 한국호랑이가 한 마리도 없고 모두가 벵골산이다. 남한에서는 이미 우리나라 고유의 호랑이가 멸종되어버린 것이다. 무분별하게 포획을 해버린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행동반경이 넓은 호랑이의 특성상 남북 분단으로 만들어진 철조망이 생태계를 단절해버린 것도 큰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북한에는 평양 대성산 유원지에 '조선범'이 사육되고 있으며 백두산 근처에 4∼50마리의 조선범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루 빨리 통일이 되어 철조망이 없어지고 한국호랑이가 다시 서식하기를 기대해 본다.
  ** 참고자료
 1.{민족문화대백과} 
 2.{세계일보} 93.2.10
 3.{한국호랑이} 김호근, 윤열수 공저, 열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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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까치

 상서로운 영물, 한국의 나라새

 이른 아침에 밝은 햇살이 봉창을 물들일 무렵 사립문 곁에서 들려오는 까치 소리를 들으면 웬지 기분이 좋다. 또한 까치 우는 소리를 들으면 반가운 손님이 오거나 기쁜 소식이 온다. 그리고 집 앞에 까치가 집을 지으면 부자가 되거나 관직에 오르고, 집 안에 있는 나무의 남쪽으로 뻗은 가지에 둥지를 틀면 집안에서 과거급제하는 인물이 나온다고 믿어왔다.
그래서 욕심많은 사람들은 까치집을 훔쳐다 집안에 들여놓기도 했으며 까치 둥지만 걸려있는 뜰안의 나무를 오르내리며 까치 흉내를 내기까지 하였다. 실제로 조선조 성종 때 까치둥지가 있는 나무를 베어다 집 앞에 세운 사람이 있었는데 미행하던 성종의 눈에 띄어 과거합격의 징표인 홍패를 하사받았다고 한다. 또한 {필원잡기}에 의하면 세종 때에는 집현전 남쪽의 큰 버드나무에 흰까치가 둥지를 틀었는데 이 때 정부의 요직을 집현전 학자들이 모두 차지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까치는 갖가지 연애설화에서 사랑을 연결해주는 매개체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견우와 직녀가 사랑을 속삭이도록 은하수에 오작교를 놓아준 새도 바로 까치이며, 이몽룡과 성춘향이 사랑을 속삭이던 남원 광한루의 다리 이름이 또한 오작교다.   한편, 까치는 은혜를 갚는 새로 알려져 왔다.
 까치가 목숨을 바쳐 은혜를 갚는 설화는 우리나라 곳곳에서 구전되어 온다. 지역에 따라 설화의 내용이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적인 내용은 이렇다. 옛날 한 선비가 과거보러 가는 길에 구렁이나 뱀에게 잡혀먹힐 위기에 처한 까치를 발견하고 구해준다. 그리하여 까치는 살아나고 구렁이는 선비에 의해서 죽는데, 선비가 나중에 다른 구렁이에게 보복을 당하여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근처 절에 있는 종이 세번 울려야만 선비가 살아날 수 있다. 이 때 선비가 구해준 까치가 나타나서 절에 있는 종을 머리로 받아 세 번 울려 선비를 구해주고, 자신은 머리가 깨져 죽는다. 이밖에도 많은 설화나 민담에는 은혜갚은 까치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이렇듯이 사람들은 예로부터 까치를 상서로운 새로 여겨왔다. 그래서 까치를 죽이는 것은 죄가 된다고 믿었으며, 오래된 까치집은 미친병이나 뱃속에 벌레가 있는 사람에게 약으로 썼다고 한다. 또한 호남지방에는, 까치의 둥지가 있는 나무의 씨를 받아 심으면 벼슬을 하게 된다고 믿는 속신이 있으며, 중부지방 사람들은 까치둥지가 있는 나무밑을 자주 지나가면 부자가 된다고 믿었다.   이처럼 까치는 오랜 옛날부터 우리민족과 친근한 야생조류로서 사람들에게 희소식을 알려주는 사령자 역할을 해온 덕분에 지난 1964년 '나라새 뽑기' 공개응모에서 압도적인 표를 얻어 영광의 나라새로 뽑혔다. 그리고 런던의 '국제조류보호회의'에서는 까치를 한국의 나라새로 정식 보고하기도 했다.

  협동심 강한 터줏대감

  까치는 참새목 까마귀과에 속하는 텃새로, 크게 나누어 검은부리까치와 노랑부리까치 등 2종이 분포한다. 이 중에서 노랑부리까치는 미국 북부의 극히 제한된 지역에 분포하는 특산종이고 검은부리까치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북반구 온대지역에 분포한다. 따라서 우리나라에 서식하고 있는 까치는 검은부리종에 속하며 울릉도와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각 지역에
분포한다. 그런데 제주도에는 지난 89년 말에 모 일간신문사가 항공회사의 후원을 얻어 인공이식을 시도 하였다. 그 결과 90년 5월에는 다섯 마리의 새끼를 부화시켜 이제 제주도에서도 까치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시도는, 울릉도 등 까치가 식생하지 않은 다른 도서지방에도 이어져 조만간에는 우리나라 전 지역에서 기분좋은 까치 울음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까치에게는 낯선 환경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 습성상 까치는 사람이 사는 동네 주변에 군락을 이루고 사는데 종족의 수가 많이 불어나 포화상태에 이르더라도 좀처럼 생활의 터전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따라서 까치를 새로운 환경에 적응시키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반면에 까치는 자신들의 생활터전이 다른 새들에 의해 침범 당하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는다. 매, 수리 등 힘세고 사나운 새들이 침범해온다 하더라도 까치들은 특유의 협동심을 발휘하여 끝내 침입자를 물리치고 만다. 한편으로 까치는 대단히 영리한 새다. 까치새끼를 어려서부터 데려다 기르면 그 주인을 알아보는데 주인이 외출하면 소매를 물고 늘어지기도 하고, 외출에서 돌아오면 반갑게 울어제친다. 뿐만 아니라 특별한 훈련을 시키지 않아도 주인이 시키면 담배 같은 물건을 물어오기도 한다고 한다. 까치가 상서로운 새로 여겨진 데는 이와 같은 까치의 높은 지능도 작용했으리라. 

 까치는 노래와 그림의 주인공

 우리나라 각지역에는 까치를 노래한 동요가 많다. 아침 저녁으로 까치소리를 듣고 자란 우리나라 어린이들은 어려서부터 까치에게 친근감을 지니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특히 어린이가 치아를 갈 때 빠진 이를 지붕에 던지면서 부르는 노래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전북 부안지역에서 전승되는 노래를 예로 들면 이렇다.
  까치야 까치야
  내 헌 이 가져가고
  네 새 이 도라
  지금도 그렇지만 어린이들이 젖니가 빠지면 미관상 우습게 보여 다른 아이들의 놀림감이 될 뿐만 아니라 음식 먹기에도 불편해 하루 빨리 새 이가 나기를 고대한다. 우리 어린이들은 이러한 마음을 하소연 하면서 염원하는 대상으로 까치를 선택했다. 까치는 상서로운 새이므로 간절하게 빌면 꼭 소원이 이뤄질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이밖에도 까치를 소재로 부르는 노래는 많았다. 까치가 집짓는 모양을 묘사하거나 까치소리를 흉내내는 등 까치의 생태를 노래한 경우도 있었고, 흙장난을 하다가 눈에 티가 들어갔을 때 티가 빨리 나오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까치는 어린이들과 친근한 새로서, 작은 소망을 들어주는 신앙적인 영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한편 우리나라의 민화에는 호랑이 그림이 많은데, 호랑이와 함께 꼭 등장하는 것이 까치다. 사실상 까치가 다른 새들에 비해서 빼어나게 아름답거나 하지는 않다. 그러나 늘상 호랑이 그림 속의 나무 위에는 까치 두어 마리가 앉아있다. 이것은, 우리 조상들이 사악함을 물리치고 복을 가져오는 민속신앙의 대상으로 호랑이와 까치를 동일하게 보았다는
의미이다. 즉, 백수의 왕 호랑이의 위엄으로 악귀를 물리치고 상서로운 새 까치로 하여금 행운을 불러오게 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이렇게 한 장의 족자로 만들어진 까치와 호랑이 그림을 우리 선조들은 정월 초하루 날 문이나 벽에 걸어 액운을 쫓는 방패막이로 삼았다. 이러한 풍속이 조선 후기까지 계속되었다는 사실이 여러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까치가 꼭 호랑이와 함께 그림 속에 등장한 것은 아니다. 옛 화가들은 소탈하면서도 단아한 자태가 돋보이는 까치를 그림의 직접적인 소재로 삼아 즐겨 그렸다. 그 중에 까치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를 예로 들면 창강 조숙(1595∼1668)이다. 그는 은근하면서도 시정이 넘치는 배경에 거칠고 성긴 붓놀림으로 소박하게 까치를 표현하여 조선 백성의 심정과 우리 자연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려 하였다.

  지명에 스며든 까치의 얼
  우리나라는 전국 어디를 가든지 산, 마을, 다리, 고개 등에 붙여진 까치와 관련된 이름을 만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오작교를 들 수 있다. 오작교는 '견우와 직녀' 전설에 나오는 은하수에 놓인 다리 이름이다. 견우와 직녀의 사랑에 감동한 까마귀와 까치들이 만들어놓은 다리, 즉 까막까치다리이다. 그런데 이 오작교가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땅 위에도 있다. 전라북도 남원군 광한루에 있는 오작교가 바로 그것인데, 돌로 만든 다리이며, 1460년 경 조선 세조 때 남원 부사로 부임한 장의국이 만들었다. 나중에 이 다리는 춘향전의 무대가 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그러므로 춘향전이 지어지기 전부터 이 다리는 오작교로 불리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춘향전의 저자는 남원 오작교를 배경으로 이몽룡과 성춘향의 연애사건을 구사했던 것이다.   하늘에 있는 오작교를 까치가 만든 것이라면 땅위의 오작교는 인간이 만들었다. 그리고 하늘의 오작교는 1년에 단 한 번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비극의 다리지만 남원의 오작교는 이몽룡과 성춘향 이래로 지금껏 숱한 남녀가 사랑을 속삭이는 만남의 자리로 이용되고 있으니 이 사실 또한 까치의 상서로운 기운이 다리 이름에 스며 있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이밖에도 까치의 이름을 딴 지명으로 눈에 띄는 것만 예로 든다면 까치성(경북 월성, 충남 천원), 까치봉(경북 영천, 강원도 고성, 전남 보성 등), 까치섬(전남 신안), 까치바위(충북 청원, 전북 순창), 까치내(충북 괴산) 등이 있다. 이처럼 까치에 얽힌 지명은 너무도 많아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게다가 충청북도, 성남시를 비롯한 전국의 많은 군(군)에서 까치를 지역의 상징새로 삼고 있다.
 좋은 소식을 알려준다는 까치에 대한 신앙이 이렇듯 불러서 기분좋고 들어서 재수좋은 지명을 숱하게 탄생시킨 것이다. 한번 붙여진 지명을 자손대대로 사용하면서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해와 굶주림에 시달리며 사라져가는 까치를 아끼고 보존하는데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까치밥과 전신주
  몇 해 전만 하더라도, 늦가을에 시골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초가집이었고, 그 초가집 뒤에는 으례히 감나무가 몇 그루 서 있었다. 그리고 감나무 꼭대기에는 노랗게 익은 감이 한두 개 가을 햇살을 받으며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이를 일컬어 '까치밥'이라 하여, 아무리 먹을 것이 없고 굶주려도 꼭 남겨 두었다. 말하자면 까치의 먹이로 남겨둔 것인데, 이와 같은 풍습에는 까치를 가까이 살게 하려는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마음씨가 절절히 배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까치가 정전 사고의 주범으로 몰려 퇴치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전주 꼭대기나 애자에 둥지를 틀면서 쇠붙이 조각까지 물어다 나르는 바람에 합선사고를 일으키고, 주위를 날다가 고압선에 부딪혀 정전사태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한전 당국에서는 부단히 까치집을 철거하지만 한 자리에 반복해서 집을 짓는 까치의 습성 때문에 부숴도 부숴도 까치는 고집스럽게 집을 지어댄다.
 까치가 전신주를 찾게 된 것은 도시 부근에 자연녹지가 적기 때문이다. 특히 서울의 까치는 녹지가 부족하여 먹이 고갈로 영양실조에 허덕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한다. 그러므로 정전사고를 일으킨다 하여 무조건 까치집을 헐어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가을철에 아무리 곤궁해도 '까치밥' 하나쯤은 남겨두던 우리 민족 전래의 풍습을 이어서 전주 위에도 둥우리용 받침대를 만들어 주는 것이 정전사고도 예방하고 자연생태계를 보호하는 길일 것이다. 

 ***참고자료 
 1.{까치이야기}, 국민은행 홍보실
 2.{민족문화대백과} 

@   56.개

  충성과 의리의 화신

 개는 인간의 생활양식에 가장 근접한 동물이다. 진화론적인 견해에서 본다면 원숭이나 유인원이 인간의 신체구조와 가장 유사하겠지만 생활 속에서 친근한 동물로 치자면 개에 비견할 것이 없다.   개는 식육목 개과에 속하는 포유동물로서 이리, 늑대와 비슷하다.
야생동물 중에서 가장 먼저 가축화되어 집안에서 사육되었다. 개가 사육된 사실에 대한 기록은 서기전 9천5백년 경의 페르시아 베르트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또한 일본에서도 신석기 시대의 유물에서 개의 치아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세계 각지에서 가축화된 개는 상호 선택, 교배에 의해 약 2백여 종의 품종이 만들어지기에 이르렀다. 무척 오랜 세월을 통해서 가축으로 순화되었기 때문에 종에 따라서 형태의 변화가 심하고 세계적으로 넓게 분포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개의 독특한 성질을 여러가지로 이용한다. 성질이 온순하고 영리하여 애완용으로 기르기도 하고 후각과 청각이 예민하게 발달되어 있어 경찰견이나 수색견으로 이용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어미의 젖을 냄새로 찾을 수 있을 정도로 후각이 발달된 개는 성별이나 개체까지 구별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어두운 곳에서 물체를 잘 구별할 수 있고 움직이는 물체를 민감하게 포착해낸다. 하지만 색채를 구분하는 능력은 약하다.
 한편, 개는 기쁘거나 슬플 때, 또는 경계를 할 때 짖어서 감정을 표현한다. 그러나 야생개는 짖지 않는다. 그리고 가축화된 개도 보통 길거리에서는 짖지 않고 자기 세력권 범위 안에서만 우렁차게 짖으며 용맹성을 발휘한다. 그러나 사나운 목소리로 짖어대는 개라고 해서 성질 자체가 사납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는 것처럼 개는 경계심과 두려움이 들 때 시끄럽게 짖어대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개가 사람이나 닭 따위를 물어뜯으려고 할 때는 조용히 노려보다가 갑자기 덤벼드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짖어대는 개를 무서워했던 겁많은 사람들이 있다면 이제부터는 짖지 않은 개를 더 조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 역사 속에서 전해 내려오는 설화나 기록에는 주인에게 충성을 바친 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다. 이러한 이야기 속에서 개는 대부분 충실하고 의리가 있는 가축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이처럼 충성을 다하거나 의리를 지킨 개의 무덤도 많다. 이를테면 경북 선산에는 의구총과 의구비가 있으며 평안남도 용강군의 의구총, 충남 부여의 개탑 등이 충성스런 개의 죽음을 전하고 있다. 또한 고려 충렬왕 8년에 개성의 '진고개'라는 곳에, 사고무친의 눈 먼 아이를 데리고 다니면서 밥을 얻어 먹이고 물을 먹여 키운 개가 있어서 화제거리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관청에서는 그 충직함을 기리기 위해 개에게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이밖에 사람이 죽어서 개로 환생한 설화도 곳곳에서 전해지고 있다.
 이와 같이 개와 관련된 설화를 통해서 우리는, 예로부터 개가 인간과 감정을 교환하는 영감적인 동물로 인식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개를 10년 이상 키우면 둔갑을 하는 영물이 된다고 믿어 늙은 개를 흉물로 보았으며 개를 선택할 때도 관상을 고려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중국과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동양의 몇몇 나라에서는 '보신탕'이라 하여 개고기를 먹는다. 비위가 약한 사람에게는 조금 미안한 이야기지만 개고기는 고단백 식품으로 정력을 키워준다고 하여 예로부터 뭇 남성들이 군침을 흘리는 대상이었다. 이같은 사실은 오늘날에도 크게 변함이 없다. 그래서 법적인 허가가 있지는 않지만 동네 골목 곳곳에서 보신탕집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수술한 환자가 회복하는 데도 개고기만큼 좋은 식품이 없다고 한다. 지난 88년 서울올림픽이 개최될 당시 개고기를 혐오식품이라 하여 추방해야 한다는 세간(세간)의 목소리가 높았지만 막상 올림픽이 끝나고 나자 개고기의 수요는 여전히 증가했다.
 사실상 우리 선조들은 개고기를 애용해왔다. 그러나 무턱대고 개를 잡아먹은 것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옛 선조들은 주둥이가 뾰족하여 사냥을 잘하는 개를 전견, 주둥이가 짧고 잘 짖으며 집을 지키는 개를 폐견이라 하였으며 살이 많아서 잡아먹기에 알맞은 개를 식견이라 하여 식용으로 썼던 것이다.
 식품학적으로 보면 개고기는 단백질과 철분이 비교적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육질이 연하고 소화가 잘된다. 따라서 체력이 아주 약한 사람에게는 적합한 식품이라고 할 수 있다. 개고기를 푹 삶아 식이성 섬유를 많이 포함한 야채와 여러가지 양념을 곁들여 탕식 또는 숙육식으로 먹는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식품이라도 평소 한집에서 살아온 정리를 생각한다면 께름칙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이 개고기인만큼 꼭 필요한 사람이 아니면 삼가는 게 좋을 듯싶다.   우리나라에서 예로부터 길러온 개의 품종으로는 진도개와 풍산개가 대표적인 것이다. 그러나 혈통의 정통성을 이어온 재래종 개는 각 지역마다 수없이 많은 종이 있었다. 이러한 토종견을 찾는 노력이 진행되면서 우리의 토종견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삽사리다. 

 귀신쫓는 개 삽사리 

 사흘만 정을 주어도 동구밖의 주인발자국 소리를 알아듣고 뛰쳐나오는, 충실하고 귀여운 그림 속의 개 삽사리는 하마터면 영원히 전설 속의 개로 파묻힐 뻔했다. 그러던 중 지난 1972년 경북대 수의학과 탁영빈 교수가 삽사리에 대한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이후 탁교수의 후계자인 하지홍 교수에 의해 삽사리에 대한 연구가 더욱 체계화 되었다.
  그동안 삽사리는 혈통이 방치된 채 그 명칭만 남아 있었는데 그것도 엉뚱하게 오용되어 왔다. 즉, 털이 길고 곱상한 외국개를 일컫는 명칭으로 잘못 사용된 것이다. 삽사리는, 들어낸다 또는 퍼낸다는 뜻의 '삽'과 귀신, 악귀를 뜻하던 '살'이 만나 이루어진 낱말로 '집안의 잡귀를 쫓는 개'라는 뜻을 담고 있다.
 삽사리는 중간 정도의 몸집(대략 50Cm 정도)에 털이 긴 개이다. 또한 털색깔에 의해 청삽사리와 황삽사리로 구별된다. 청삽사리는 검은 색의 긴 털에 회색털이 섞여 있어 달빛을 받으면 푸른 빛을 띠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고, 황삽사리는 누런색 털에 흰색과 검은 색의 털이 들어 있어 여러가지 누런빛을 띈다. 대체로 황삽사리가 청삽사리보다 조금 큰 편이다.
 삽사리는 온몸이 털로 덮여 있어 두 눈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또한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털이 퍽이나 야성적인 인상을 풍긴다. 한편으로 길게 내뱉고 있는 혀와 가려진 눈이 해학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짖는 소리는 우렁차며 짖을 때 아래 송곳니 두 개가 드러난다.   삽사리의 이같은 겉모양은 동양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것이다.
어떤 경로를 통해 한반도에 들어왔는지 알려진 바는 없지만 경주 지방에는 삽사리에 대한 하나의 속설이 전해 내려온다. 구전에 의하면 삽사리는 신라시대 왕궁에서만 길러지던 귀한 개였는데 통일신라가 망하면서 민가로 널리 퍼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속설이 사실이라면 신라시대 폭넓은 해상 무역로가 있어서 인도, 중동, 중국 등지에서 유입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무릇 대부분의 모든 개가 그러하겠지만, 삽사리는 특히 어릴 때 사귄 주인을 오래도록 따른다. 설령 주인과 헤어지더라도 오래도록 기억한다. 그러나 낯선 상대에게는 사나운 성질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현재, 대구 근교 하양의 '대구목장'에서 관리되고 있는 삽사리 성견(자란 개)50마리는 지난 1991년 '고유견 삽사리 보호육성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과학기술처 특정연구과제로 선정되었다. 여기에는, 유전자를 통해 혈통을 연구하는 하교수를 비롯, 각 분야에 8명의 교수가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

  진도개

  지난 1938년 5월 3일, 천연기념물 53호로 지정된 진도개는 현재 1만 5천여 마리가 전남 진도에서 사육되고 있다. 진도개는 일본인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따라서 진도개의 이력은 지금 두 갈래의 평가를 받고 있다. 그 하나는 '일본도 인정할 만큼 우수한 우리 개'라는 찬사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의 내선일체정책의 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는 견해이다. 후자의 견해 때문에 진도개는 8.15 이후 수난을 겪는다. 즉, 일제의 잔재라는 이유로 배척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이 '세계적인 개로 개발해보라'고 한마디 하자 진도개는 대량으로 육지로 건너오게 되었지만 그 중 90%이상이 죽고 말았다. 다행히 1962년 문화재 보호법이 만들어져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진도개가 유입된 경로도 다른 토종개와 마찬가지로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설이 전해온다. 첫째, 고려 초기 중국 산동성 어민들이 탄 배가 풍랑을 만나 진도에 표류하면서 종자를 뿌렸다는 설. 둘째, 고려 중엽 몽고 침입시 삼별초군이 진도에서 항전할 때 몽고군이 군견으로 데리고 와서 전파시켰다는 설. 세째, 조선조 초기 진도군 지산면에 국영목장을 설치하면서 번견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몽고에서 수입해 왔다는 설 등이 그것이다. 일제시대 일본인들에 의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지 어언 50년이 훨씬 넘었지만 아직까지도 진도개의 혈통은 확실하게 고정되지 않았다. 또한 특별한 사유없이 진도 밖으로 반출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법이 있다 뿐이지 거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다시 말하자면 도시에서 돈뭉치를 들고 와서 어렵지 않게 밀반출해갈 수 있었고, 이렇게 도시로 나간 개는 차츰 특유의 성품을 잃고 겉만 번드르한 개가 되고 말았다.

  사냥의 명수 제주개

  천해의 바다 가운데 우뚝 솟은 환상의 섬 제주도는 경관이 뛰어나서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지만 유전학적으로 보면 각종 동식물의 종자오염을 가장 적게 받는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재래종을 연구하는 연구가들에게 제주는 종자 자원의 보고라 할 수 있다.   이같은 사실을 반영하듯 지난 1986년에는 제주 토종개인 '제주개'가 멸종 직전에 발견되어 토종개에 대한 일반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86년 당시 제주도 축산사업소는 제주대 교수진과 함께 제주개에 조예가 깊은 노인들을 찾아가 기초자료와 민담 등을 수집, 3개월간 제주도 전역을 뒤진 끝에 제주개 3마리를 발견했다. 그후 선택계통번식법에 의해 10마리가
견사에서 관리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 혈통이 고정되지 않은 상태이다. 삽사리가 학문적으로 접근되고 있는 반면 제주개에 대한 연구는 아직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는 실정이다.
 제주개는 얼핏 보면 진도개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러나 꼬리가 곧추 서 있으며 주둥이가 길고 이마가 튀어나왔으며 머리 모양이 역삼각형인 점이 진도개와 다르다. 청각, 후각, 시각이 유난히 발달되어 사냥에 능하고 영리하며 털은 황색이다.
 제주개의 유입경로에 대해서는 다른 개와 마찬가지로 정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다만 몽고 침입시 유입되었다는 설과 중국의 절강성에서 전래되었다는 설이 상존하고 있다. 그리고 시기는 대략 8∼9천 년 전쯤으로 보인다.
 이밖에도 일제시대 진도개와 함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개마고원 지역의 풍산개(지금 북한에서는 갑산개로 불린다)도 토종견의 가능성이 많다. 또한 경남의 거제개나 전남의 해남개도 우리 토종견으로 발굴할 수 있는 유망한 견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선인들과 고락을 같이 해온 토종개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민족 고유의 명견을 육성하는 것은 전통문물 보존 차원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 참고자료 
 1. {식품사전}
 2.[우리개 삽사리를 아십니까], 주간 {시사저널}1991.4.18일간 
 3.{문화일보} 92.10.8
 4.이철호,{장터순례} 유림 
 5.{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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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호품>

 57.차

 애연가와 고기를 즐기는 사람에게 필요한 비타민의 보고

 우리 선조들은 옛날부터 하루 세 끼 밥먹듯 자주 행해지는 일을
'다반사'라고 했다. 마치 차를 마시는 일처럼 빈번하다는 뜻이다. 또한 명절 때 조상에게 지내는 간략한 제사를 차례라 하고, 질서와 예의를 지키는 뜻의 '차례'도 같은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차는 우리가 보통 기호품으로 마시는 차를 뜻하는 말이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차를 마시고 살아왔으며 남부지방 여러 곳에서 차나무가 재배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삼차' '모과차' '생강차'니 하는 것들은 마실거리에 '차'자를 붙이는 것으로 이는 잘못이다. '차'란 반드시 차나무에서 딴 어린 잎을 가공하여 만든 것으로, 커피나무 열매를 가공하여 만든 것을 '커피'라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니까 애초에 마실 수 있도록 가공된 '차'가 먼저 있었던 게 아니고 '차나무'가 먼저 있었다는 말이 된다.   다방이 생겨나면서부터 일반인들에게 차가 널리 보급된 것도 사실이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차가 서양에서 들어온 커피에 밀려나게 되었다. 그래서 아예 다방이 커피숍으로 바뀌고 있으며 흔히들 '차 마신다'는 말이 '커피 마신다'는 의미로 바뀌고 말았다. 또한 우리차가 널리 애용되는 것을 방해하는 한 가지 요인을 지적한다면 '다도'라는 것을 들 수 있다. 다도는 일본에서 수입된 예법이다. 차는 원래 우리나라를 통해서 일본으로 건너간 것인데, 언제부턴가 거꾸로 차 마시는 법이 일본에서 건너오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차의 역사를
아무리 뒤져봐도 차를 마시는 데 까다로운 예법이 있다는 기록은 없다. 초의선사도 말하기를 차는 아무런 격식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마시면 된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숭늉 마시듯이 편하게 마시면 된다는 말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차는 신라 흥덕왕 3년(828년)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김대렴이 귀국하는 길에 차나무의 종자를 얻어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 차나무 종자를 지금의 지리산 기슭에 심어 번식시켰다고 한다. 또한 설화에 의하면 수로왕의 7왕자가 외숙인 보옥선사를 따라 화개의 운상원에서 수도할 때 심은 차의 유종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다고 한다. 그러나 차를 마시는 습속은 신라 27대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다고 하니 우리 고유의 재래종 차나무가 이 땅에 자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김대겸이 차의 신품종을 당나라에서 가져와 지리산 산록에 심어서 이후 더욱 성하게 되었을 뿐이다.
 이처럼 지리산 일대에서 자란 차나무 잎으로 만든 차를 죽로차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대나무 숲속에서 이슬을 받아먹고 자란 차라는 뜻에서 이름 붙여진 것이다.
 고려 때에는 나라에 공로를 세운 장군이나 재상이 세상을 떠나면 임금은 이를 애도하는 뜻에서 차를 하사했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에는 차가 아주 귀한 물건으로 취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차를 엽전처럼 줄에 꿰어두고 몸살이나 감기에 걸리면
이것을 물에 달여서 마셨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것을 청태전, 또는 전다라고 불렀다고 한다. 불교가 왕성했던 시기는 대체로 차가 생활에서 큰 몫을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불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면서 차는 산간의 선방에서나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할 정도로 줄어들었지만 차가 오늘날까지 현대인의 기호품으로 사랑받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차나무는 동백과에 속하는 다년생 상록수로 자연상태에서는 10여 미터 정도까지 자라지만 보통 재배할 때는 알맞은 높이로 잘라서 가꾼다. 습기가 많고 무덥지만 시원스런 바람이 계속 불어와 무더위를 씻어주는 곳이나 아침에 햇볕이 잘 들고 낮에는 그림자가 지는 계곡을 낀 산비탈에서 잘 자란다.
 참고로 차의 재배적지는, 연간 강우량 1,500∼2,000mm 정도에 토양은 약산성(PHC)이고 연평균 12℃ 정도의 해발 200m이하인 곳이다.   일반적으로 차를 따는 시기는 곡우(곡우)를 전후한 4월 20일경이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다른 나무는 꽃이 져야 열매를 맺는 반면 차나무는 열매가 영그는 철에 꽃이 핀다. 그래서 차나무를 일컬어 실화상봉수라 한다. 즉, 꽃과 열매가 마주 본다는 뜻이다. 남쪽지방 차밭에는 해마다 늦가을이면 찬서리 속에서 영롱하게 맺혀 있는 차꽃을 볼 수 있다. 차꽃은 하얀색으로 무궁화처럼 다섯 쪽이다. 이 다섯 쪽은 각각 차가 지닌 다섯 가지 맛을 상징한다. 또한 차꽃의 흰색은 군자에게는 지조를, 여자에게는 정절을 상징한다.
 차는 잎을 따는 시기에 따라서 봄차, 여름차, 가을차로 나누고 각 계절마다 첫물, 두물, 세물, 만물차로 부르기도 한다.
 또 제품의 형태에 따라서 잎차, 고형차, 가루차로 나누기도 하고 만드는 방법에 따라 일쇄차, 가마덖음차, 증자차 등으로 나눈다. 그리고 발효의 정도에 따라 불발효차인 녹차, 반발효차인 우롱차, 발효차인 홍차 등으로 분류한다.
 우리가 흔히 시중에서 접하는 작설차, 설록차, 춘설차, 다운령, 학사차 등은 제품명이다.

 성분

 우리 고유의 차는 그 맛과 향기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비타민 A,B,C,D와 탄닌, 카로틴, 카페인, 아미노산, 철분 등이 다량 함유되어 있다.   이중에서 탄닌은 떫은 맛을 내는 성분이다. 이 성분은 피부의 세포를 수축시키는 작용을 해서 피부의 노화를 막아준다. 그리고 이 탄닌을 섭취하게 되면 니코틴이나 타르 같은 유해물질에 반응하여 이것들과 결합하는데 이것은 물에 녹지 않으므로 위장에 거의 흡수되지 않고 대부분 몸 밖으로 배출된다. 다시 말하면 탄닌이 니코틴이나 타르 등의 유해물질을 무독화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완벽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담배를 즐기는 사람이 녹차를 자주 마시면 흡연의 해악을 상당히 덜어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녹차는 애연가의 건강을 여러모로 돕는다. 흡연자들은 흔히 비타민 C의 결핍으로 얼굴이 검어지게 되는데 비타민 C의 보고인 녹차를 많이 섭취함으로써 얼굴색을 정상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 이처럼 차는 담배 없이 못 사는 애연가에게는 반가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차에 들어 있는 카페인은 몸의 신진대사를 촉진하는 작용을 한다.
여기에 비타민 B1과 비타민 C 등의 작용이 더해져 피하지방을 연소시키며 이렇게 처리된 물질은 몸 밖으로 배설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차에 들어 있는 비타민 C는 특히 열에 강한 성질을 지니고 있어서 뜨거운 물에 차를 끓여 먹어도 파괴되지 않고 남아 있다. 이것은 아마도 탄닌의 작용에 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가장 최근에 밝혀진 차의 성분으로는 불소와 폴리페놀류를 들 수 있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불소는 충치예방 효과가 있는데 차에 함유되어 있는 불소의 양은 매우 적다. 그러나 폴리페놀류라고 하는 강한 항균작용을 하는 성분이 들어 있어 충치균과 치주병균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주목을 끌고 있다.

 쓰임새

 차는 일반적으로 기호품으로 사용되며 한방에서는 약용으로 사용한다.   최근에 서구나 일본의 학자들은, 차의 성분이 농약 등의 각종 공해나 방사성 암과 성인병, 심지어 에이즈 예방에까지 효력이 있다는 분석 결과를 발표해 더욱 주목을 끌고 있다.
 그밖에 녹차잎을 이용한 재미있는 생활의 지혜도 많다.   차를 특별히 즐기는 많은 사람들이 다 우려먹은 녹차잎으로 베개를 만들어 사용한다. 녹차잎을 넣은 베개를 베고 자면 녹차의 은은한 향기가 남아 머리를 맑게 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수험생이 있는 집에서는 해볼 만한 일이다.   베갯속을 만드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3∼4회 우려먹은 차잎을 모아두었다가 신문지를 깔고 통풍이 잘 되는 그늘에서 이틀 정도 말린다. 이를 촘촘한 옷감으로 만든 베개주머니에 넣고 꿰매면 된다. 오래 사용할 경우에는 아예 차잎을 비닐 주머니에 싸서 넣으면 먼지부스러기가 스며나올 염려도 없다.
 또한 차잎을 이용하여 조리를 하는 경우도 있다. 차잎을 오이소박이에 넣으면 좋은 양념이 되고 삶은 달걀 껍질에 금이 많이 가게 한 후 녹차잎을 넣고 5∼6시간 가량 삶으면 녹차 맛이 노른자에까지 배어 달걀 특유의 구린내가 없어지고 보존기간도 두 배로 늘어난다.
 이밖에도 백설기, 빈대떡, 만두 등을 만들 때 사용하기도 한다. 

 이것이 토종 
 지리산은 차의 모산이다. 화엄사, 천은사, 쌍계사 부근의 계곡에는 지금도 차나무가 많이 야생하고 있으며 초의선사가 지은 [동다송]에는 화개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차밭이 있고 그 품질이 뛰어나다고 찬양한 대목이 있다. 이밖에도 무등산 등지에서 품질 좋은 우리차가 재배되고 있다.
 특히 화개차는 83년 8월 지방 기념물 61호로 지정된 우리의 토종이며, 쌍계사 입구에는 우리나라 차 시배를 기념하는 [김대겸공차시배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이 추모비는 81년 5월 25일 건립되었는데 '한국다인회'는 추모비 건립일인 5월 25일을 '차의 날'로 정하여 기리고 있다. 
 ***참고문헌 
 1. 이형석, [한국의 산하], 홍익제, 1990. 8
 2. 이철호, [장터순례], 유림, 1991. 6 
   3.{조선일보} 92.10.16
 4.월간 {식품과 건강} 92.1월호 

@   58.술

  인류와 함께 탄생한 풍류의 상징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화나 전설에는 으레 술이 등장한다. 즉, 신과 함께 술이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을 때, 술은 어쩌면 인간보다도 앞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서양에서는 술을 관장하는 '바커스'라는 신이 있을 정도이며 이집트 신화에는 최고의 여신 이시스(Isis)의 남편 오시리스(Osiris)가 보리로 맥주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술에 대한 이야기는 {제왕운기}의 주몽신화에서 최초로 등장한다. 이 신화에서 천제(천제)의 아들 해모수는 압록강 변에서 놀고 있는 세 처녀를 보고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버린다. 세 처녀는 하백의 딸 유화, 선화, 위화였다. 해모수는 신하를 시켜 유혹하였으나 이 처녀들이 응하지 않았다. 낙담한 해모수는 고민끝에 새로 웅장한 궁궐을 지어 그녀들을 초청하고 술을 대접한다. 처녀들이 만취되어 돌아가려 하자 해모수는 앞을 막고 하소연을 한다. 그러나 두 처녀는 달아나고 유화만 해모수에게 붙들려 궁전에서 잠을 자게 된다.   해모수의 행위에 분노한 하백은 도술 싸움을 벌인다. 그 결과 해모수의 신성성이 입증되자 주연을 베풀어 모두 취하게 한 후 해모수와 유화를 가죽 수레에 태운다. 그러자 남녀는 취중에 수레 안에서 한몸이 되고 해모수가 깨어나면서 햇빛을 타고 승천하게 된다.
 그 뒤 유화가 아들을 낳아 주몽이라 했으니 그가 바로 나중에 고구려를 세운 동명성왕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신화를 통해서 술의 기원을 밝혀내기는 어려우며 인류의 형성과 더불어서 자연적으로 발생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어쨌든 술은 문자의 발생보다 먼저 나타났으며 중국 은나라 시대의 유적에서도 술 빚는 항아리가 발견된 바 있다.

 민족의 특성 반영하는 술의 문화

 세계 여러 민족들은 저마다 독특한 자연환경과 풍토에 맞는 술을 빚어 왔다. 그리고 각 민족에 따라 술을 빚는 전통적인 비법들이 발전해 왔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기록에 나타난 우리나라 술의 역사는 삼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한시대에는 이미 누룩을 사용하여 곡주를 제조한 흔적을 볼 수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 시기부터 술은 제천의식(제천의식)의 필수적인 제물이었다. 추수가 끝나면 모든 부족민이 한자리에 모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추수에 감사하는 의미로 술을 마시며 노래하고 춤추었던 것이다.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등이 그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술은 화합의 상징이었다. 제천의식에서 술이 제물로 등장한 것도 따지고 보면 신과 화합하여 하나가 되려는 염원이 드러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술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화합을 도모하게 한다. 이를테면 제주도 무속신화인 '나주 기민창 조상' 신화에서는 술이 사람과 사람을 화합시키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제주도 안씨 선주가 흉년으로 굶어 죽게 된 제주 백성을 위해 쌀을 구하러 육지에 나갔으나, 육지 사람들의 인심을 움직이지 못해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주(나주)에서 술을 마시다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즉, 쌀로 막걸리를 빚어 술독에 담아서 동네 곳곳에 놓고 나주 백성들이 오가면서 바가지로 떠먹게 하였다. 그랬더니 나주 백성들은 사정을 이해하게 되었고 안씨 선주가 쌀을 구해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한편, 각 민족마다 술 문화는 하나의 풍습으로 생활 속에 자리잡고 있다. 우리의 전통적인 정서 속에서 술은 인정의 표현이었고 친지와 이웃 간에 즐거움을 나누는 도구였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손님을 맞으면 정중히 술을 대접하였고, 농촌에서는 막걸리를 빚으면 이웃 어른과 친지를 불러 술을 내놓고 대화의 자리를 마련하곤 하였다.
 가정에서뿐만 아니라 주막, 또는 주점에서도 우리 겨레는 술로 인정을 나누었다. 장날 동네 어른을 만나면 목로주점에 들어가 막걸리 한 사발을 대접하는 것이 우리네 인사법이었고 친구들과 어우러져 서로 속마음을 털어놓는 데 가장 좋은 매개물도 역시 술이었다.

 약 주고 병 주는 술

 술은 알맞게 마시면 약이 된다고 한다. 기분이 가라앉았을 때 힘과 용기를 복돋워 주고 피로를 덜어준다. 그리고 농사철에는 일의 성과를 올려주고 일체감을 주어 작업을 원할하게 하도록 한다. 또한 흥에 겨워 적당히 취하면 노래와 춤을 곁들여 신명과 멋을 낼 수도 있다. 어느 민족이든 잔치 때 술을 마시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농촌에서뿐만 아니라 문학에서도 술은 남녀간의 사랑 만큼이나 많이 묘사되고 있다. 정철, 윤선도 등 조선시대 문장가들도 술을 논하며 무상한 인생을 달랬다.
 이처럼 술은 멋과 풍류와 정서를 가다듬게 하여 생활에 활력 주는 반면 지나치게 마시면 악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일찌기, 조선의 실학자 정약용 같은 이는 "차를 마시는 민족은 흥하고 술을 마시는 민족은 망한다"고 개탄한 적도 있다. 사실상 그 때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의 음주벽은 좀 지나쳤다고 할 수 있다. 무분별한 음주로 가산을 탕진하고 몸을 버려 패가망신하는 경우도 허다했으니 말이다. 지금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1인당 음주량이 세계 1위라는 통계만 보더라도 그것을 증명할 수 있다. 전통적인 술의 예법은 사라져 버리고 폭음하는 습관만 남아서 닥치는대로 마셔대는 사태에 이르고 만 것이다.

  우리나라 술의 역사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실제로 술이 등장한 것은 삼한시대 무렵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는 삼국시대 후기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동안 우리 술은 종류도 다양해 졌고 그 명성이 중국에까지 전해졌다. {제민요술}에 의하면 중국의 술빚는 기술을 도입한 우리나라는 이를 발전시켜 독특한 주조법을 개발하였고 일본에까지 기술을 전파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이 시대에는 누룩을 사용한 술이 일반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송나라, 원나라의 양조법이 도입되어 보리와 쌀을 술에 이용하였으며 술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특히 고려 후기에 들어서는 증류주 문화가 유입되어 주곡 뿐만 아니라 수수, 조 등을 이용한 술이 개발되기에 이른다.
 우리나라 술의 역사상, 지금까지 유명주로 손꼽히는 것들은 주로 조선시대 때 정착된 것들이다. 이때부터 술은 고급화 추세를 보여 양보다는 질 좋은 술들이 개발되었으며 증류주는 일본, 중국 등지에 수출도 하였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 와서는 각 지방의 특성을 살린 지방주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때 유명한 술로는 서울의 약산춘, 여산의 호산춘, 충청의
노산춘, 김천의 청명주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소주에 각종 약재를 응용한 술들이 새로 개발되어 전라도의 이강주, 죽력고 등이 유명해졌다. 그리고 양조주와 증류주를 혼합한 혼성주로서는 과하주가 유명하다.
 이처럼 조선시대에 활짝 꽃피운 우리 술 문화는 일제 침략을 맞이하기 전까지 절정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외래주도 적잖게 도입되어 토속주와 외래주가 공존하는 현상을 빚어냈다. 그러다가 19세기 말에는 마침내 양주 문화가 도입되기에 이른다. 또한 국권이 일본으로 넘어가면서 일제가 수탈 목적으로 과중한 주세를 부과하는 바람에 전통적인 향토주와 토속주는 자취를 감추게 되고 신식술이 획일적으로 제조되어 우리의 전통적인 술 문화를 발칵 뒤집어놓고 말았다. 

 서민들의 벗 막걸리 
 우리나라에서는 예부터 그 종류를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술들이 제조되었지만 오늘날까지 서민들의 입맛을 돋궈주는 전통주로 대표적인 것을 들라면 막걸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막걸리는 청주를 떠내지 않고 그대로 걸러낸 술로, 빛이 탁하며 알콜 성분이 적다. 그래서 옛 문헌에는 '혼돈주'라는 이름으로 나오기도 하고 탁주, 약주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막걸리는 쌀과 누룩으로 술을 빚은 뒤 숙성되면 술밑을 체에 받아 버무려 걸러낸 것이다. 그러면 쌀알이 부서져서 뿌옇게 흐린 술이 된다. 보통 농촌에서는 농주라 하여 농사철에는 식량만큼이나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일제 침략기에 이르러 주세법이 제정됨에 따라 막걸리 빚기가 규격화 된다. 그리고 일제시대 말기부터 만성적인 식량부족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여 외국산 양곡을 많이 도입하는 바람에 1964년부터 막걸리에 쌀의 사용이 금지되고 밀가루 80%, 옥수수 20%의 도입양곡을 섞어 빚게 되었다. 이와 같이 막걸리에 밀가루를 사용하자 술맛이 떨어지게 되어 서민들은 맛없는 막걸리보다는 소주를 선호하게 되었다. 또한 중산층이나 상류층은 맥주와 양주를 찾게 되었다.
 그 뒤 쌀 생산량이 다시 늘어 식량자급이 이뤄지고 쌀이 남아돌게 되자 1971년 쌀막걸리를 다시 허가하였다. 그러나 술 빚는 방법이 규격화 되었고 대형 양조장에서 화학약품을 첨가하여 빚는 바람에 좀처럼 옛맛이 살아나지 않았다. 말하자면 전통적인 막걸리는 이미 되살릴 수 없는 옛맛이 되고 만 것이다. 또한 국민들의 생활 형편이 나아지고 국내에서도 양주가 생산되어 이제는 서민들도 막걸리보다는 맥주나 국산 양주를 즐겨 찾는 단계에 이르고 만 것이다. 
 ** 참고자료 
 1.{민족문화대백과}
 2.{한국문화상징사전} 
 3.{다시 찾아야 할 우리의 술},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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